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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칼럼

약으로부터 할머니 지켜준 ‘그 곳’

등록 :2021-06-02 14:01수정 :2021-06-03 02:38

숨&결

ㅣ 양창모 강원도의 왕진의사

‘전등이 왜 이러지?’ 늦은 저녁, 샤워를 하려는데 욕실의 불이 켜지질 않는다. 전등이 나갔다. 창문이 없는 욕실이라 불이 켜지지 않으면 암흑이다. 할 수 없이 간접조명처럼 바깥의 불을 켜놓고 욕실로 새어 들어오는 불빛에 의존해서 샤워를 했다. 윤곽만 어렴풋이 보였지만 샤워를 할 수 있었다. 비누가 어디에 있는지 샤워기가 어디에 달려 있는지 몸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겨울. 눈이 많이 내린 날. 할머니 집 앞의 눈은 일찌감치 치워져 있었다. 몇달 전 가을에 왔을 때도 할머니는 밭에 나갔다 들어오는 길이었다. 할머니가 치매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샤워를 하면서 그 놀라움은 깨달음으로 바뀌었다. 치매는 기억의 전등이 나가는 상황과 같다. 그럼에도 할머니가 자신의 일상을 해나갈 수 있는 건 그 일상이 지난 칠십년 동안 매일같이 해오던 일이기 때문이다. 습관이 할머니를 지켜주고 있었고 몸의 기억이 치매를 밀어내고 있는 거였다. 만약 할머니가 지금의 몸 상태로 집이 아닌 다른 곳, 요양원이나 병원에 입원한다면 훨씬 많은 약을 복용해야 할 것이다. 불안을 감소시키기 위해, 낯선 곳에서 문제행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할머니 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처방하는 약들이 늘어날 것이다. 다른 곳에 있었다면 복용했을 약들을 복용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집에 있기 때문이다. 집은 약으로부터 할머니를 지켜주는 보호막이었던 셈이다.

나이가 들고 몸의 기능이 떨어질수록 자신에게 익숙한 공간은 중요하다. 기억의 전등이 깜박거릴 때는 더욱 그렇다. 어둠이 내려도 몸의 기억은 불빛이 되어 우리의 삶을 지켜줄 것이다. 그러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 그것은 집이다. 그 집으로 의료진이 찾아가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아픈 사람을 건강한 사람이 찾아가야 한다는 인도주의적 차원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다. 기억에 어둠이 내리고 암흑 속에 있는 주변의 사물들이 자신을 공격할 때 노년의 존엄성을 지키려면 집에서의 삶을 최대한 지켜줘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의료는 노인들에게 집을 허락하지 않는다.

시작은 엉덩이에 생긴 작은 뾰루지였다. 왕진 가서 만난 또 다른 할머니의 뾰루지가 7㎝짜리의 거대한 욕창으로 발전하는 동안 찾아오는 의료진은 없었다. 도움을 청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저희는 고혈압 당뇨 환자만 방문해요”(보건소) “방문 간호부서가 없어졌어요”(대학병원) “너무 멀어서 못 갑니다”(사설 요양기관) 이런 대답만 들었을 뿐이다.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수십만원짜리 욕창 연고. 그것이 유일하게 접근 가능한 의료였다. 하지만 그 연고는 오히려 욕창을 악화시켰다. 그럼에도 나는 그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아들이 어머니의 욕창에 정성스럽게 발라놓은 걸 봤기 때문이다.

방문진료는 비효율적이다. 의료진이 길 위에서 버리는 시간도 많다. 하지만 그 비효율성은 우리 삶의 존엄성을 위해 꼭 필요하다. 그래서 공공의료의 역할이 중요하다. 누워 있는 사람의 권리가 지켜지지 않는 사회는 걸을 수 있는 사람의 권리도 지켜지지 않는 사회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거나 병이 들면 걸을 수 있는 사람도 결국 누워 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누워 있는 사람의 권리가 지켜진다면 걷는 사람의 권리는 저절로 지켜진다. 이것이 타인의 권리가 지닌 나비효과이다.

와상 상태에 있는 노모를 홀로 돌보던 아들은 이제 어머니를 집에서 간호하는 걸 포기했다. 어머니의 입원 때문에 집을 비우게 되면 아흔이 넘은 아버지는 홀로 밥상을 차려 먹어야 한다. 안방에서 나와 식탁에 앉는 것도 힘들어하셨던 분이다. “어이구, 우리 엄마 불편한가봐. 하하.” 환갑이 가까운 아들이 어머니의 체위를 변경해주며 웃었다. 이 소중한 일상은 작은 뾰루지 하나 때문에 깨졌다. 방문진료가 불가능한 시골 삼거리. 지역통합돌봄시대가 열렸다는 플래카드가 바람에 씩씩하게 펄럭이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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