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택
논설위원
성난 국민의 하야 요구에 대통령은 김병준-한광옥 카드를 방패로 내세웠다. 하야는커녕 거국내각의 절차조차 무시했으니 물러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셈이다. 갖고 있는 법적 권한을 최대한 활용해 버텨보겠다는 대통령에 맞서 선택할 방법은 많지 않다. 당장은 야3당 합의대로 별도의 특별검사와 국정조사로 대통령이 뭘 잘못했는지 국민 앞에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게 필요하다. 그런데도 버티면 법대로 할 수밖에 없고, 탄핵이 유일한 수단이다. 그 지경까지 간다면 대통령과 국민·국회가 맞서는 상황이다. 상상하기 싫지만 민심과 담 쌓고 지내온 그간의 행적을 봐선 ‘탄핵 유발’로 가는 게 아닌지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탄핵의 사유는 차고 넘친다. 헌법재판소는 오늘의 사태를 예상이라도 한 듯 ‘국민의 신임을 배반하는 뇌물수수·부정부패·국가이익을 해하는 행위’나 ‘법치국가 원리와 민주국가 원리를 구성하는 기본원칙에 대한 적극적인 위반행위’(2004헌나1)를 전형적 탄핵 사례로 콕 짚고 있다.
지금까지의 보도를 보면 여기에 딱 들어맞는다. 대통령 지침을 받은 거로 보이는 청와대 참모가 나서 재벌로부터 774억원을 갈취해 재단을 만들었으니 전형적인 권력형 ‘부정부패’에 해당한다. 검찰 수사, 세무조사, 사면 등 이해관계가 걸린 기업들로부터 받은 돈은 ‘뇌물수수’ 혐의도 뚜렷하다. 헌법에 엄연히 국무회의와 각부 장관의 권한과 역할을 정해놓았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장관·수석들과는 독대도 않으면서 비선 실세와는 정책·인사까지 상의했다니 ‘법치국가 기본원리’를 심각하게 훼손한 헌법위반이다. 청와대 제2부속실을 통째로 최순실씨에게 내주고, 문화체육관광부를 아예 ‘최씨 모녀 맞춤형’으로 개조해 장관에서 실·국장까지 싹 바꾼 것도 정부 구성의 ‘근본’을 뒤흔드는 행위다. 대통령 연설문뿐 아니라 교육문화수석실 문건, 국토교통부 보고서까지 정부 문서들을 줄줄이 보내준 것 역시 불법임은 물론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숱한 헌법과 법률 위반 사항들만으로도 대통령으로서 ‘국민을 심각하게 배신’하는 행위다. 한자릿수로 떨어진 지지율이 이를 잘 말해준다.
‘민주국가의 기본원칙’을 크게 벗어나 나라 전체의 민주주의 수준을 수십년 전으로 후퇴시킨 일이야말로 탄핵해 마땅한 사유다. 구국봉사단이 미르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40년 전 최태민씨가 기업 돈 뜯어내던 수법이 그대로 되살아났다는 사실이 ‘40년 후퇴’를 상징한다.
박근혜-최순실 체제의 국정농단이 4년 가까이 벌어지는 동안 청와대·정부·여당에서 누구 하나 문제 삼지 않았다. 비 맞는 ‘공주마마’ 우비 씌워주고, 연설문이 걸레가 돼 돌아와도 침묵하며, 비선 실세라면 대표가 밥을 굶어서라도 증인채택을 막아줬던 여당. 누가 하는 말인지도 모른 채 ‘우주의 기운’ ‘혼이 비정상’ 운운하는 걸 받아적고 금과옥조로 떠받든 장관과 청와대 참모들. 민주정당, 민주정부와는 거리가 멀다.
정윤회 문건에 등장하는 ‘십상시’와 ‘비선 실세’의 존재는 덮으면서 오히려 보고서 작성한 이들을 법정에 세우고, 총장만 보고받겠다며 특별수사팀까지 꾸려놓고도 ‘우병우 수사 상황을 우병우에게’ 보고한 검찰이 역시나 최순실 수사마저 대통령을 피해 축소하려는 조짐이다.
야3당 합의대로 별도 특검을 꾸려 불법을 추려내고, 국정조사로 희대의 국정농단 실체도 함께 드러내는 게 시급해 보인다. 그러고도 안 되면 최후수단으로 국민 여론의 힘으로 헌법적 절차를 준비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까지 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