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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걸스로봇’을 응원하는 이유 / 윤태웅

등록 2016-01-13 18:31수정 2016-01-13 18:31

한국공학교육학회지 편집위원을 할 때의 일입니다. 여학생, 편입생, 유학생, 타교 출신 대학원생 등 공과대학 안 소수자의 목소리를 담아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학생의 글을 받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뜻밖이었습니다. 여자화장실도 별로 없던 1970~80년대나, 여학생이 있어 봐야 한 과에 한두명에 불과했던 80~90년대와는 사정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스스로 소수자라 인식하는 여학생이 별로 없었던 것입니다. 공대 건물에도 여자화장실은 층마다 있고, 여학생들은, 15% 안팎이지만, 함께 어울려 다닐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 15%는 나머지 85%보다 공부도 더 잘하는 편이었지요. 적어도 평균적으로는 그랬습니다. 제 수업에서도 앞자리를 차지한 여학생들이 에이플러스(A+)를 휩쓸어가는 건 꽤 흔한 일이었습니다. 현실이 이러하니 소수자로서 글을 써보겠느냐고 하면 여학생들이 갸우뚱거릴 수밖에요.

몇 해 전 여성공학자선도사업 결과 평가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저와 함께 평가위원석에 앉아 있던 여성 기업인이 평가를 받으러 온 사업단장인 남성 교수에게 이렇게 주문했습니다. “회사에서 보고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제가 집어던집니다. 그럼 여자애들은 질질 짭니다. 남자애들은 안 그러거든요. 제발 공대 여학생들도 좀 강하게 키워주세요.”(저는 궁금했습니다. 서류를 왜 집어던지는지 말입니다.)

세상은 학교와 다릅니다. 학교에선 만만한 상대였던 남자애들이 세상에선 갑자기 커다란 장벽이 될 수도 있지요. 남성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며 높은 자리까지 올라선 과거의 여성 리더들은 때로 남성보다 더 남성적이어야 했습니다. 그리하면서도 집안일 하고 자식 키우며 그 험난한 과정을 거쳐낸 분들에겐 경의를 표합니다. 하지만 이는 과거의 방식입니다. 특출한 사람들만의 몫이기도 하고요. 이젠 슈퍼우먼이 아니어도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현실은 여전히 녹록지 않습니다. 공학계열의 여학생 비율은 2013년에 17.9%였고, 여성 전임교수 비율은 5%였다고 합니다. 공학계열 전공 비취업 여성 가운데 출산·육아 등의 이유로 직장을 그만둔 경력단절 여성의 비율이 무려 69.5%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공과대학에 여학생이 부족하다는 사실보다는 이들이 세상에 나가 여성 공학자나 엔지니어로 활약할 수 있는 토대가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다는 게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지난달 20일 로봇공학 관련 여성들의 네트워크인 ‘걸스로봇’이 첫 모임을 열었습니다. 여성 로봇공학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자리였습니다. 한데 이 뜻깊은 소식을 전한 기사를 포털사이트에서 보니, ‘성별과 무관한 공학 이야기를 왜 성별을 나누며 하는가?’ 같은 식의 댓글도 제법 눈에 띄더군요. 엄연한 유리천장의 존재, 차이가 차별을 낳는 구조적 요인을 인지하지 못한 사람들의 견해라 여겼습니다. 이들에겐 소수자 우대 정책(Affirmative action)도 역차별로 비칠 것입니다. 한국에선 낯설지 않은 풍경입니다.

윤태웅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
윤태웅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
소수자 우대 정책은 역차별이 아니라 차별 해소를 위한 디딤돌입니다. 공과대학 교수 임용에도 이런 정책이 필요합니다. 여성 공학자들만을 대상으로 초빙 공고를 낼 수도 있고, 채용 과정에서 여성 공학자를 우대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몸담은 학부에선 2014년 공채 때 여성 우대를 명시해 여성 공학자들의 지원을 유도한 바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교수 임용엔 이르지 못했지만, 소수자 우대 정책을 논의하고 합의했던 건 아주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다른 공대에서도 여성 공학자 초빙을 시도해보면 좋겠습니다. 저희 대학도 다시 추진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윤태웅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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