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바나나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였다. 중남미 바나나 산업을 독점했던 미국계 다국적기업을 상대로 한 대투쟁이었다. 파업 뒤 코스타리카 정부는 농업노동자 최저임금제를 도입했으며, 미국의 뉴딜정책을 본떠 공공근로를 대폭 늘렸다.
1940년 새 대선이 실시되었다. 개혁의 지속 또는 중단을 결정할 선거였다. 이 무대에 세 사람이 등장한다. 첫째는 여당의 칼데론 과르디아 대통령 후보. 개혁 의지가 있던 보수 포퓰리스트. 둘째는 젊은 변호사 마누엘 모라. 투철한 마르크스주의자. 셋째는 빅토르 사나브리아. 훗날 산호세 교구의 대주교.중남미에 온 지 몇달밖에 안 되었는데 평생 먹을 바나나를 다 먹은 것 같다. 바나나 공화국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코스타리카 경제에서 농산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6.5%인데 이것을 바나나와 커피가 양분하고 있다. 프리미엄급 수출용 바나나 1㎏에 우리 돈으로 1300원이 채 안 되니 모든 사람이 부담 없이 즐긴다. 하지만 바나나가 싸다는 말은 노동자의 인건비가 낮다는 뜻이다. 열악한 노동조건에, 최저임금보다 약간 더 높은 임금을 받을 뿐이다. 이들은 사설 하청업체에 속해 있어 불안정 고용을 감내해야 한다. 또한 바나나는 제초제, 살균제, 살충제를 많이 투입하는 작물이다. 네가몬이라는 살충제에 노출되어 불임, 암, 유산, 유전적 기형을 겪었던 1만2000명의 노동자들에게 정부가 배상을 해주라는 대법원 판결이 최근 나오기도 했다. 현재 농업노동자 문제는 이곳의 주요 노동 현안이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바나나 노동자들이 국가를 크게 변화시킨 사건이 있었다.
지금부터 꼭 80년 전인 1934년 가을의 일이다. 바나나 노동자들이 전국적인 총파업을 벌였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총파업, 중남미의 바나나 산업을 독점했던 미국계 다국적기업 유나이티드 푸르트사를 상대로 한 노동 대투쟁이었다. 노동자들은 6시간 교대근무, 쿠폰이 아닌 현금으로 임금 지급, 산재 인정 등을 요구했다. 유나이티드는 정부와 결탁하여 노동자들을 분열, 회유, 협박했고 결국 총파업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파업은 국민들에게 장기적으로 큰 유산을 남겼다. 파업의 선두에 섰던 카를로스 파야스는 <마미타 유나이>라는 노동 소설을 써서 ‘40년대 문학세대’를 주도하기도 했다.
총파업이 왜 발생했었는가. 바나나는 원래 소농들이 소량으로 재배하던 작물이었다. 그런데 1872년 대규모 플랜테이션에서 단일작물 재배가 시작되었고 곧 해외수출이 이루어졌다. 산업발전이 낙후되어 있어 노동조직은 변변치 않았고 주로 수공업 장인들과 농업노동자들의 노동운동만 있었다. 1929년의 세계 대공황은 이 나라 경제에 직격탄을 안겼다. 3년 사이 수출은 절반 이하, 수입은 4분의 1 수준으로 급감했고 금융은 몰락했으며 도시 중산층과 농업노동자들은 빈곤의 늪에 빠졌다. 1933년 수도 산호세에서 일어난 실업자들의 시위가 유혈사태로 이어졌고 그 이듬해 바나나 총파업이 일어났던 것이다.
일단 파업은 끝났지만 노동자들의 요구를 무턱대고 막을 순 없었다. 정부는 커피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한 기구를 신설하고, 1935년에는 농업노동자 최저임금제를 도입했으며, 미국의 뉴딜정책을 본떠 공공근로를 대폭 늘렸다. 이 때문에 레온 코르테스 대통령은 ‘시멘트와 강철 정부’라는 별명을 얻었다. 대공황을 계기로 국가의 경제 개입이 늘어났지만 그런 조류가 갑자기 등장한 건 아니다. 19세기 말부터 정부 주도의 사회정책 흐름과 1920년대 기독사회주의 운동의 경험이 있었다.
또한 중남미 대륙 중 예외적으로 급진좌파 정당이 허용되었고 이들이 소수이긴 하나 선거 때마다 의회에 진출하여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했다. 이처럼 작더라도 확실하게 노동자 편에 선 정당이 의회에 들어가는 게 중요하다. 코스타리카는 대공황 시대에도 개도국 중 민주주의를 계속 유지한 드문 사례에 속한다. 또한 좌파의 약진에 자극받은 우파가 가톨릭교회의 지원을 받아 국민공화당을 창당해서 극좌파 세력과 개혁 경쟁을 벌인 점도 특이했다.
1940년에 새로운 대선이 실시되었다. 개혁의 지속 또는 중단을 결정할 중대한 선거였다. 이 무대에 세 사람이 등장한다. 첫째, 여당의 칼데론 과르디아 대통령 후보. 개혁 의지가 있던 보수 포퓰리스트. 집권을 위해서라면 막후거래도 서슴지 않고,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는 노회한 정치인. 둘째, 젊은 변호사 마누엘 모라. 투철한 마르크스주의자. 1931년 노동자농민당의 창설을 주도. 노동운동 원칙과 정치적 수완을 겸비한 전략가로서 타이밍과 과단성을 갖춘 인물. 셋째, 빅토르 사나브리아. 훗날 산호세 교구의 대주교. 원래 정치색이 옅고 가톨릭교회의 입지에만 관심이 있던 전형적인 고위 성직자. 그러나 19세기 말 레오13세 교황이 발표한 회칙 ‘새로운 사태’라는 노동헌장이 중요한 사회교리로 등장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고 그것에 코드를 맞출 줄 알았던 감각의 소유자. 자신의 성향과 관계없이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노동운동을 지지했던 인물.
칼데론이 먼저 패를 꺼냈다. 두 건의 거래를 물밑에서 성사시켰다. 대통령 코르테스에게 이번에 자신을 밀어주면 4년 뒤 그를 다시 밀겠다는 언약을 한다. 또한 사나브리아 주교에겐 교회의 지원을 호소한다.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인 나라에서 교회의 지지는 절대적인 효과가 있다. 사나브리아는 지원의 대가로 반성직주의 법률의 개정을 요구했다. 학교에서 종교 교육 실시, 수도원 신설 허용 등 교회에 꼭 필요한 사항이었다. 라틴아메리카에는 가톨릭이 대세지만 정교분리 이념 때문에 교회의 영향력을 통제하려 한 나라가 많았다. 그레이엄 그린의 <권능과 영광>에도 이런 상황이 잘 그려져 있다. 밀약을 성사시킨 칼데론은 좌파정당의 공약 중 비교적 온건한 것들을 자기 공약에 대거 포함시켰다. 보수가 진보 노선을 귀신같이 선점한 것이다. 결과는 80%를 득표한 칼데론의 압승이었다.
대통령 자리에 오른 칼데론은 약속대로 코스타리카대학 설립, 사회보장법 제정, 사회부조 원칙을 담은 헌법 개정 등 개혁 조치를 밀고 나갔다. 그 결과 대농장주와 엘리트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들은 전임 대통령과 손잡고 칼데론 정권을 흠집 내는 데 전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코르테스 일파는 대통령과 결별하는 분당을 감행했고 칼데론은 지지세력의 대거 이탈로 일생일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는다.
여권의 분열로 정정이 불안해지자 모라가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수개혁 정권의 약화를 방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헌정 중단에 일조하느냐, 아니면 이 틈을 타 개혁을 심화하느냐를 놓고 당내에서 치열한 논쟁이 오갔다. 모라가 내부 비판을 무릅쓰고 개혁을 지지하는 쪽으로 결단을 내렸다. 그러나 급진 좌파에 대한 의구심이 널리 퍼져 있는 상황에서 실천이 쉽지 않았다. 이때 사나브리아 대주교가 교회 내의 극심한 반대를 뿌리치고 양측 사이 중재에 나섰다. 당시 코스타리카 주재 미국대사 핼릿 존슨의 회고다. “대주교는 모라가 똑똑하고 신실하며 진정으로 빈곤층을 염려하는 정치인이라고 했다. 모라와 그 추종자들이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건 사실이지만 외부세력과 결탁한 것 같지는 않다고 안심시켜 주었다.”
양측의 공조로 1943년 종합적인 노동법이 제정되었고, 사회보장부가 신설되어 라틴아메리카 최초로 전국민 의료보험이 실시되었다. 이때 삼자가 함께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옅은 미소의 깡마른 공산당수, 작고 온화한 인상의 대주교, 근엄한 표정의 대통령. 모라 당수는 훗날 의회에서 ‘조국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국립병원 본관 앞에는 칼데론의 흉상과 어록, 사회보장의 상징물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사나브리아 대주교는 종교를 떠나 지금껏 국민의 큰 어른으로 추앙된다. 사회적 대타협의 효과는 197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타협이 가능했던가. 우선 절박했던 시대 상황이 있었다. 또한 협상을 통해 결과를 꼭 도출하겠다는 민주적 유연성이 정치문화로 깔려 있었다. 대농장주와 자본가들의 결속이 약했던 점도 한몫했다. 2차대전 중 미국과 소련이 연합하고 있던 배경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주제로 <신성동맹>이라는 책을 쓴 유진 밀러는 세 사람이 각각 자기 진영 내 반대세력을 설득할 수 있는 정치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지적한다. 여기 사람들 말대로 “오직 코스타리카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을까.
코스타리카의 노동조건은 나중에 신자유주의의 공세로 다시 악화되긴 했지만 대타협의 의미는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역사학자 이달리아 히메네스는 코스타리카 국민의 인권의식이 바나나 총파업과 삼자 동맹의 경험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한다. 세계 노동권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정치적 교훈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