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시간이 다 된 것 같은데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내가 찾는 강의실은 보이지 않는다. 이번 시간의 강의 과목이 뭔지도 떠오르지 않고, 강의 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지금 내가 엉뚱한 남의 학교에 와서 헤매고 있는 건 아닌가. 이거 큰일 났구나! 당황해서 정신을 차려 보면 한바탕 꿈이다. 절로 나오는 쓴웃음에 잠이 달아난다.

사람마다 자기 나름으로 악몽의 레퍼토리가 있게 마련일 텐데, 정년퇴직 뒤부터 내 악몽의 무대는 학교인 수가 많다. 재직하는 동안에는 오히려 모르고 지냈지만, 실은 내 무의식은 은연중 직업의 압박에 눌려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퇴직을 하고 나자 압박감이 약화되면서 꿈으로 영상화되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고백하거니와 나는 교수라는 직업에 대해 별로 충성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아니, 본래 그랬다기보다 점점 충성도가 떨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그러니까 1990년대 중반 ‘세계화’란 구호와 더불어 구조조정 바람이 대학에 몰아치기 시작한 뒤부터 차츰 강의실에 들어가는 것이 소가 억지로 고삐에 끌려가는 것처럼 느껴졌고, 수업을 마치고 나오면 늘 “이게 아닌데” 하는 자책감이 밀려왔다. 교수라는 직업에 대해 가지고 있던 정체성의 자명함이 나의 내부에서 근본부터 흔들리게 되었다고 할까. 학생들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강의하는 내용과 집에 돌아와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 공부 사이의 점증하는 괴리 때문에 일종의 이중생활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멀리 충북대 철학과 윤구병 교수나 가까이 영남대 영문과 김종철 교수처럼 잘 아는 분들이 더 보람 있는 일을 위해 교직을 떠난다고 할 때마다 그것이 나에게는 양심의 위기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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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시장의 논리가 대학을 지배하기 전까지 대학의 고위 행정직과 교수진은 대체로 학자들로 충원되는 것으로 믿어져 왔다. 대학교 총장은 흔히 “학식과 덕망을 갖춘”이라는 상투적 수사로 묘사되기 일쑤였다. 적어도 인문학 분야의 교수들은 선비정신이라는 말에서 자부심의 근거를 찾았고, ‘어용’의 비난을 듣는 교수들조차 비판적 지식인의 자의식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물론 이 설명은 한국 교수 사회의 실제에 그대로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6·25전쟁 후의 곤궁했던 시기에, 그리고 오랜 군사독재 시대에 아마 더 많은 교수들은 양심에도 어긋나고 학문과도 거리가 먼 방식으로 팍팍한 삶을 꾸려갔을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가슴속 이상은 지조 있는 선비였고 내세운 명분은 학자의 가난이었다.

요즘 세태에 어울리지 않게 이런 회고적 감상을 털어놓는 까닭은 지난 3월25일 박근혜 정부 공정거래위원장으로 내정되었던 후보자가 결국 사퇴하면서 ‘사퇴의 변’으로 “본업인 학교로 돌아가 학자로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한다”고 발표한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 기사를 읽고 나는 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구시대적 자존심의 마지막 한 자락이 시궁창에 던져지는 것 같은 비참함을 맛보았다. 수십억원대의 해외 비자금 운용 혐의가 드러나 공직자로 적합지 않다고 판명된 분이 “학자로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본업인 학교로 돌아간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는 데 대해 강의 시간 늦을까봐 전전긍긍했던 나 같은 사람의 상식은 도저히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 그 기사를 읽은 대부분의 전·현직 교수들이 자기들 ‘본업’의 위상에 대해 심한 회의와 혼란을 경험했을 것이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라는 소리만 없어도 나는 그런대로 참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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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내 주변에서는 정년을 10년 가까이 앞두고 퇴직을 신청하는 교수들이 늘고 있다. 그 가운데 내가 만난 한 교수는 ‘퇴직의 변’으로 “하고 싶은 공부를 맘껏 하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오늘날 한국 대학 사회가 어떤 곳인지 아는 사람은 이 말이 단순한 반어가 아님을 실감할 것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대학 사회 주변에서 교수 될 꿈을 안고 10년, 20년 강사 생활로 전전하다가 끝내 희망을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예비 학자들 소식이 들려올 때다. 이 양극화가 해소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정의로운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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