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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칼럼

[박노자칼럼] 포로 신세의 대한민국

등록 :2010-03-01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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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찰스 디킨스에게 <두 도시 이야기>(1859)라는 명작이 있다. 요즘 국내 상황을 보면서 ‘두 재판 이야기’라는 주제로 한 편의 소설을 쓸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달 12일, 정리해고에 저항했던 쌍용자동차 노조 간부 8명에게 3∼4년의 실형이 선고됐다. 진압의 폭력성을 문제삼지 않았던 재판부는 노조의 “상식을 넘은 폭력”을 판결 근거로 삼았다. 파탄을 가져다준 무차별적 “해외자본 유치”에 대한 국가와 경영자의 책임을 묻지 않고서, 노조의 점거파업이 회사를 파산 직전으로 몰고 갔다고 봤다. “상식”이라는 단어를 봤을 때에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저항을 시도한 노동자들을 “시범 케이스”로 만들어 무찔러야 한다는 것은 한국 자본의 “상식”이지만, 해고를 당하면 결국 자식 학비도 벌어주지 못하는 도시빈민으로 전락한다는 것은 노동자의 상식이다. 대기업들이 각종 세제혜택을 받고 기록적 경상이익을 내는데도 이렇다 할 복지망이 계속 없는 이 나라에서 돈이 없어 병원에 못 가는 어르신, 등록금 부담에 자살을 감행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것은 서민의 상식이기도 하다. 재판부는 과연 어느 쪽의 상식을 준거틀로 삼았는가? 불문가지의 일이다.

쌍용 노동자 재판 이전에, 새해를 앞둔 정부는 한국의 갑부인 이건희 전 삼성 회장에게 “새해 선물”을 증정했다. 그는 배임과 조세포탈로 유죄판결을 받았음에도 당연하게(?)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는데, 결국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서 2018년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활동해야 한다”고 정부가 범죄기록을 지워준 셈이다. 경제범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인물이 대한민국을 국제무대에서 대표한다는 것이 과연 국가적 수치에 가까운 일이 아닌가라는, 매우 당연한 의문을 주요 매체들이 제기하지도 않았다. 노동자의 몸으로 “사회적 살인”이라고 할 만한 해고에 저항하면 감옥에 가고, 회장님의 몸으로 그 어떤 경제범죄를 저질러도 결국 지장 없이 국제올림픽위원회로 갈 수 있다는 것이 이 나라의 “상식”인 셈이다.

한국의 “기적적” 경제발전을 설명하려는 일각의 개발전문가들은 한때 개발독재의 “상대적 자율성”을 극찬했다. 노동과 자본의 자기중심적 요구로부터 자유로우면서 합리적으로 설정한 개발 목표를 향해 총력을 집중시키는 관료국가, 즉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도 금융계의 단기이익 추구도 다 억제하면서 저임금 노동과 관치금융이라는 초고속 개발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강성국가가 “기적”을 일으켰다는 이야기였다. 임금인상 요구를 과도하게 억제해 내수가 아닌 수출에만 매달려 있는 절름발이 경제를 만든 것이 잘한 일인지 필자는 잘 모르지만, 독재 시절에 금융계나 대기업들의 지대추구적 행각이 어느 정도 억제돼 경제개발이 촉진됐다는 점은 분명히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과연 어떤가? 민주화에 별로 기여하지 않았음에도 민주화의 결실을 가장 많이 따게 된 재벌기업들은 사실상 대한민국을 포로로 삼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재벌 경영인 출신의 대통령 치하에 재벌의 출자를 기다리는 대학들도, 재벌의 이익을 “국익”으로 보는 사법권력도, 재벌의 광고에 의존하는 진보신문들까지도 재벌 앞에서 감히 미동도 하지 못하고 있다.

“기업국가”(corporatocracy)라고 할 대한민국에서는 쌍용 노동자가 갖는 시민권과 재벌 회장이 갖는 시민권은 질적으로 다르다. 사회적 정의도 국가적 합리성도 없는, 극소수를 위해 대다수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이 체제하에서 이 나라는 장기적으로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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