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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칼럼

[아침햇발] 청와대의 ‘이상한’ 브리핑 / 오태규

등록 :2009-04-06 21:22

오태규 논설위원
오태규 논설위원
아침햇발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다. 그래서 처음엔 설마 했다. 아무렴 외국 정상과 한 회담 내용까지 왜곡할 수 있을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점차 ‘설마’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커지고 있다.

청와대 대변인은 지난 2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직후 서면 브리핑에서 “두 정상은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가 유엔 안보리 결의 1718호를 명백히 위반한 것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했습니다. 특히 오바마 대통령은 유엔 안보리의 제재 결의안을 준비중에 있다고 말했습니다”라고 전했다. 앞부분은 이제까지 양쪽 정부 관계자들이 수차례 되풀이해온 말이지만, 뒷부분은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 ‘빅뉴스’였다.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제재 결의안’이란 용어까지 사용하며 “준비중”이라고 발언한 것은,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를 앞둔 시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내의 거의 모든 언론들도 청와대 대변인의 전언을 근거로 미국의 새로운 대북 강경 입장을 대서특필했다.

하지만 정작 미국 쪽의 설명에선 이런 부분이 없다. 미국 쪽도 보도자료 및 고위관계자의 배경 설명을 통해 회담 내용을 나름대로 상세하게 설명했지만, “국제사회의 일치된 대응” “유엔에서 어떻게 단호하게 대응할지 긴밀 협의”라는 것이 가장 강도가 높은 표현이다. 당연히 오바마 대통령이 하지도 않은 말까지 청와대 대변인이 얹어서 브리핑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여기저기서 제기됐다.

실제 오바마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과의 회담을 전후해 일본, 중국, 프랑스 등의 정상들과도 만나 북한 문제를 논의했으나, ‘제재 결의안’이라는 용어는 단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는 북한이 인공위성을 쏘아 올린 직후 “규칙은 지켜야 하고 위반 행위는 벌받아야 한다”고 강하게 북한을 비난했으나, 여기서도 그런 말은 쓰지 않았다. 이런 정황을 고려하면, 청와대 대변인이 전한 오바마 대통령의 ‘제재 결의안 준비중’ 발언은 유추됐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청와대의 공식 입장은 오바마 대통령이 그런 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청와대의 다른 관계자는 브리핑의 진위 논란이 빚어지고 있는 와중에 “미국은 브리핑을 하지 않은 것이고 우리는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대변인이 정상회담 전부터 언론에서 대북 제재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명확하게 해준 것일 수도 있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그래도 ‘왜 미국은 이런 중요한 얘기를 브리핑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식적인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문제는 국회와 언론에서 이런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데도 발언의 진위를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는 청와대 대변인의 공식 해명이 없다는 것이다. 아마 대변인은 유엔 안보리에서 미국이 강경 대응을 주장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 봐라. 결국 내 말대로 상황이 돌아가고 있지 않으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에 그런 말이 있었던 것과, 뒤에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엄연하게 다르다. 미국이 지금 안보리에서 강경 대응을 주장한다고 해서 오바마 대통령이 정상회담 당시 그런 발언을 했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것은 아니다.

정상회담에서 오간 말을 공개하는 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신뢰가 걸린 중대한 문제다. 청와대가 정상회담에서 오간 말까지 입맛에 맞게 적당하게 버무려 전달한다는 의심을 산다면, 나라 체면은 땅에 떨어지고 나라 안의 일에 대한 불신도 커질 것이다.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밖의 일이건 안의 일이건 신뢰를 쌓는 첫걸음이다.


오태규 논설위원o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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