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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칼럼] 카불이 아니라 워싱턴이다

등록 :2007-07-31 17:29수정 :2018-05-11 15:56

홍세화 기획위원
홍세화 기획위원
홍세화칼럼
또 한 명의 억울한 희생자가 생겼다. 7월30일 밤, 탈레반 대변인을 자처하는 카리 유수프 아마디는 “카불 정부가 우리의 반복된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 오늘 저녁 6시30분에 남성 인질 한 명을 살해했다”고 <로이터> 통신 기자에게 전화로 통지했다. 오늘로 납치 14일째, 인질 석방 협상은 난항을 거듭했고 희생자만 늘어났다. 둘째 희생자가 생긴 급박한 상황에서도 한국 정부는 협상이 장기화할 것에 대비한다는 여유 있는 소리를 내놓고 있었다.

과연 우리 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가? 배형규 목사가 희생되었을 때, 한국 정부의 특사가 급히 날아갈 곳은 카불이 아니라 워싱턴이었고, 인질 석방을 위한 압박 대상도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아니라 부시 미국 대통령이 아니었을까? 한국의 언론도 정부와 마찬가지로 카불만 바라볼 뿐 미국을 바라보지 않고 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다. 역지사지로 탈레반의 처지에 서 볼 필요가 있다. 탈레반은 왜 한국인들을 납치했나? 탈레반에게 미국과 한국은 누구이며, 카불 정권은 무엇인가. 먼저 카불 정권은 탈레반에게 미국의 괴뢰정권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은 아프간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에 눈독 들여 오다가 9·11 테러를 빙자하여 2001년 전쟁을 일으킨 뒤 탈레반 정권을 몰아낸 제일의 적대국이며, 한국은 그 미국의 요구에 따라 군대를 파견한 적성국이다. 우리가 직시해야 할 점은 탈레반이 우리 피랍자들을 단순한 인질이 아닌, 적성국 포로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몸값을 주고 해결한다는 정부의 생각이 틀렸음은 사태 진전이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한국 정부는 미국의 요구에 따라 아무 적대관계가 없는 이라크에 파병했듯이 아프간에도 파병하여 스스로 탈레반의 적성국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에 따른 만반의 조처를 취했어야 마땅했다. 무엇보다 적성지역에 우리 국민이 들어갈 수 없도록 했어야 했다. 또 납치 소식을 들었을 때 연말까지 기다릴 게 아니라 즉각적으로 철군을 시작함으로써 적성국에서 벗어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밝혔어야 옳았다. 정부는 자국민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가능한 모든 조처를 취하는 미국을 본보기로 따르지 않았고 문제의 출발점이면서 문제 해결의 열쇠를 실제로 쥐고 있는 미국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미국에 대해서는 대통령부터 예스맨들뿐인 정부이기 때문인가? 정부는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게만 목소리를 내면서 정부 시늉을 하는 모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민도 적성지역에 들어간 피랍자들의 책임을 묻는 식의 태도를 보여선 안 된다. 협상에서 일관성을 보인 쪽은 카불 정권이 아니라 탈레반이었다. 탈레반 수감자를 석방하지 않으면 또다른 인질을 살해하겠다는 카리 유수프 아마디의 협박을 헛소리로 들어선 안 된다. 우리는 죽음의 공포 앞에 선 인질들의 처절한 모습과 피 말리는 기다림 속에 있는 가족들의 간절한 모습을 끊임없이 상기하며 단 한 사람의 희생자라도 더는 생기지 않도록 온힘을 모아야 한다. 그 길은 정부와 국민이 한목소리로 지난 3월 이탈리아 사람 다니엘레 마스트로자코모와 탈레반 포로가 교환된 뒤 더욱 “테러조직과 협상 없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카불 정권에 탈레반 수감자를 내주지 않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는 미국을 압박하는 것이다.

21명의 인명이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 열쇠는 카불이 아니라 워싱턴이 쥐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말해야 한다. “한국 정부가 미국인을 한국인처럼 대하길 바란다면 미국 정부 또한 한국인을 미국인처럼 대해야 한다”고.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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