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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1990년대부터 줄곧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이어왔다. 11월 미 대선에서 그가 승리하면 내년 이후 실제 철군·감축 움직임이 시작될 수 있다. 이 경우 한국에선 ‘자체 핵무장’ 주장이 더 거세게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1990년대부터 줄곧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이어왔다. 11월 미 대선에서 그가 승리하면 내년 이후 실제 철군·감축 움직임이 시작될 수 있다. 이 경우 한국에선 ‘자체 핵무장’ 주장이 더 거세게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AP 연합뉴스

길윤형 | 논설위원

‘한반도 비핵화’를 주장해온 진보 언론의 구성원으로 한국의 ‘독자적 핵무장’에 대해 언급하는 것만큼은 최대한 삼가려 노력해왔다. 하지만 북한이 공세적인 ‘핵 독트린’을 가진 핵보유국의 지위를 확보했고, 북·러가 지난달 옛 냉전기에 버금가는 동맹 관계를 회복한 이상,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게 됐다. 나아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7일 열린 미국 대선 토론회에서 ‘끔찍한 패배’를 당하며,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해 온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집권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 상태다. 트럼프가 내년 1월 권좌에 복귀한다면, 주한미군의 감축·철수와 한국의 핵무장에 관한 논의가 자연스레 한-미 간의 주요 현안으로 떠오르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때 논의의 시작점이 되어야 하는 원칙은 우리가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일방 탈퇴하는 ‘북한식 핵무장’이나 국제사회의 감시를 벗어나 몰래 핵 능력을 키우는 ‘박정희식 핵무장’을 시도할 순 없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 문제는 우리의 ‘유일한 동맹’이자 ‘여전한 패권국’인 미국과 협의를 거쳐 결정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핵을 가지려는 한국의 열망, 미국의 냉철한 계산, 북·중 등의 격렬한 저항 등 여러 변수의 상호작용 속에서 최종 결론이 나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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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을 생각할 때 참고해야 할 전례는 1970년대 초 리처드 닉슨 행정부 때 이뤄진 주한미군 철수와 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이다.(‘미국 대선 후 국제질서’를 주제로 열린 국립외교원의 지난 4~5일 열린정책대화 논의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닉슨이 1969년 7월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아 국가들 “스스로 책임지게 할 것”이라는 ‘괌 독트린’을 내놓은 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조기 종식과 주한미군을 포함한 아시아 주둔 미군의 감축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트럼프 역시 집권하게 된다면, “24시간 안에 끝낼 수 있다”고 밝혀온 우크라이나 전쟁을 서둘러 끝내고, ‘2기 때’로 미뤄둔 주한미군 감축을 시도할 수 있다.

반세기 전 같은 상황에 몰렸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2년 7·4 남북공동선언을 통해 남북관계 개선을 시도하는 한편, ‘자주 국방’과 ‘핵 개발’을 동시에 추진했다. 한-미 간의 치열한 협상 결과 미국은 미 7사단(1만8천명)을 빼는 대신 한국에 15억달러의 유·무상 군사원조를 내놓게 된다. 또 정부가 적극 추진한 자주 국방에선 큰 성과를 거뒀지만 독자적 핵무장은 미국의 강한 압박에 굴복해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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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할 경우, 한-미 협상의 핵심 쟁점은 주한미군 감축을 용인하는 대가로 미국에서 얼마나 많은 ‘핵옵션’을 얻어낼 것인가로 모아질 것이다. 핵무장을 적극 주장하는 한국 내 전문가들은 당장 ‘독자적 핵무장’까진 얻지 못하더라도 일본과 같은 수준의 ‘핵 잠재력’(nuclear latency)은 확보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미국은 1988년 미-일 원자력협정을 통해 일본엔 ‘우라늄 농축’과 ‘사용 후 핵연료의 재처리’ 권한을 허용하고 있다. 이 능력이 있으면 한국도 일본처럼 국가가 결심하는 순간 비교적 단기간에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야 한다. 미국이 일본에 이 능력을 허락해준 것은 플루토늄을 평화적 목적으로 활용한다는 이른바 ‘핵연료 사이클 계획’이 전제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계획의 ‘핵심’인 고속증식로 건설 계획은 이미 기술적으로 파탄에 이르러, 일본은 아오모리현에 짓고 있는 재처리 공장의 완공을 26번이나 연기하는 중이다. 이 때문인지 일본은 자신들이 가진 핵 잠재력에 대해 국제사회가 시비를 걸까 봐 ‘비핵 3원칙’을 큰 목소리로 내세우고 있다. 이런 복잡미묘한 상황을 무시한 채 한국이 ‘밑도 끝도’ 없이 군사적 목적임이 분명한 재처리 권한을 달라고 조르면 미국은 난처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떠들면 떠들수록, 얻어낼 수 있는 핵옵션의 폭은 급격히 좁아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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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내년 이후 윤석열 정부의 폭주 가능성이다. 불과 몇달 전 남북 화해를 주장했던 박 전 대통령이 선택한 길은 결국 ‘10월 유신’이었다. 여러모로 궁지에 몰린 윤 대통령 역시 주한미군 철수 논의가 본격 시작되면 안보 위기를 내세우며 권위주의적 통치를 강화할 가능성이 있다. 독자적 핵무장론 역시 국민의힘의 정권 재창출을 위해 남용될 것이다.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