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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 당시 ​스탈린과 김일성 초상이 걸린 건물 앞에서 시가전을 벌이는 유엔군. AP 연합뉴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스탈린과 김일성 초상이 걸린 건물 앞에서 시가전을 벌이는 유엔군. AP 연합뉴스

박찬승 |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

 며칠 뒤인 6월25일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4년이 되는 날이다. 한국전쟁은 20세기 한국사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사건이자, 세계사에서는 동서 냉전을 심화시킨 중요한 사건이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과정에는 이 전쟁과 관련된 각국 지도자들의 심각한 오산과 오판이 있었다.

우선 북한의 경우를 보자. 북한 정권 수립 직후부터 ‘국토완정’을 앞세우며 전쟁을 통한 통일을 꿈꾸어온 김일성은 1949년과 1950년 봄에 소련의 스탈린을 만나 전쟁 지원을 요청했다. 1949년 봄에는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거부하던 스탈린은 1950년 봄에는 이 요청을 받아주었다. 이때 스탈린은 전쟁이 나면 미국이 개입하지 않겠냐고 김일성에게 물었다. 김일성은 중국의 국공내전에도 개입하지 않던 미국이 그보다 작은 한반도의 전쟁에 개입할 리가 없다고 주장하고, 혹시 미국이 개입한다 해도 그 전에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낼 계획이라고 스탈린을 설득했다. 그러나 미국은 전쟁이 나자마자 즉각 개입을 결정하고, 유엔군을 조직해 한국전쟁의 주역으로 나섰다. 김일성의 판단은 완전히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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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북한의 김일성과 박헌영은 전쟁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면 남한의 남로당 잔여 세력 20만여명이 봉기해 남한 정부를 전복시킬 것이고, 북한군은 한달 이내에 남해안까지 진격해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좌익 세력의 봉기는 없었고,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에 방어선을 구축해 3개월가량을 버텼다. 그리고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완전히 뒤집혔다. 전쟁은 그 뒤로도 3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를 보면, 한국군은 사망자 13만여명, 부상자 45만여명, 북한군은 사망자와 부상자 52만여명, 유엔군은 사망자 3만여명, 부상자 10만여명, 중국군은 사망자 13만여명, 부상자 20만여명 등이었다. 민간인 피해도 커 남한에서는 사망자가 24만여명, 학살된 민간인이 12만여명이고, 북한에서는 28만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통계). 결과적으로 북한은 엄청난 희생자를 낸, 불필요한 전쟁을 도발했다는 비난만 받게 되었다.

소련의 경우를 보자. 1949년 8월 핵실험에 성공하자 스탈린은 미-소 냉전 대결에서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 1949년 9월 중국공산당이 국민당 정권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우자, 동아시아의 정세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김일성 정권이 한반도 전역을 장악하게 된다면, 소련의 영향력이 한반도 남단까지 미칠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소련이 한반도 전쟁에 직접 군대를 보내기는 어렵다고 보고, 전쟁이 일어나 만일 북한이 불리하게 될 경우엔 소련 대신 중국이 나서서 군대를 지원하게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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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개입을 가장 우려한 스탈린은 1950년 1월 미 국무장관 애치슨의 연설과 맥아더 전문 등 여러 정보를 분석해, 태평양에서 미국의 방위선이 일본-오키나와-필리핀으로 이어진다고 보고, 한국은 여기에서 제외되었다 판단했다. 따라서 한국에서 전쟁이 나더라도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 내리고 김일성의 전쟁 개시를 용인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전쟁이 나자마자, 이를 소련이 북한을 앞세워 미국에 도전한 행위로 받아들였다. 미국은 일본에 있던 극동사령부의 미군을 바로 한국에 보내고, 대만에도 7함대를 파견했다. 미-소 냉전이 고조되던 시점에 미국은 소련의 도전에 강력히 대응한 것이다. 스탈린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1954년 10월1일 마오쩌둥 중국 공산당 주석(오른쪽부터)과 김일성 북한 주석,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 등이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 위에서 중국 건국 5돌 열병식을 함께 지켜보고 있다. 베이징/AFP 연합뉴스
1954년 10월1일 마오쩌둥 중국 공산당 주석(오른쪽부터)과 김일성 북한 주석,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 등이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 위에서 중국 건국 5돌 열병식을 함께 지켜보고 있다. 베이징/AFP 연합뉴스

중국의 경우를 보자. 스탈린은 4월 모스크바에 온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마오쩌둥의 동의를 조건으로 걸고 북한의 전쟁 개시를 허락했다. 이에 김일성은 5월에 베이징으로 가 ‘스탈린은 이미 전쟁 개시에 동의했다’며 마오에게 동의를 요청했다. 이때 마오가 스탈린에게 전문으로 동의 사실 여부를 문의하자, 스탈린은 회답 전문에서 자신은 동의했지만, “만일 중국 동지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를 다시 토론해서 정해야 한다”고 했다. 마오도 전쟁 개시의 책임을 같이 지자는 말이었다. 결국 마오는 미군의 개입을 우려하면서도 전쟁 개시에 동의했다. 마오가 동의한 것은 스탈린이 이 전쟁을 하기로 이미 결심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여러모로 소련의 도움이 필요했던 신생 중국의 지도자로서 마오는 스탈린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때 마오가 동의했기 때문에, 그해 10월 북한에 26만명의 군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고, 휴전 때까지 13만여명의 중국군이 사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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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경우를 보자. 미국은 1949년 6월 한국에서 군사고문단을 제외한 모든 미군을 철수시켰다. 이는 북한에서 소련군이 철수한 것에 대응한 것이긴 했지만,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간과한 것이기도 했다. 미군 철수 후에도 설마 소련이 북한을 앞세워 남침하겠느냐고 생각해,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보다는 경제원조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애치슨라인 같은 것을 발표해 소련과 북한을 고무시켰다. 그 결과는 소련군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의 전면 남침이었다.

한국의 경우를 보자. 한국은 1949년 이후 북한과 잦은 국경선 충돌을 벌였고, 북한의 전면 남침에 대해서도 우려해 미국에 군사원조를 대폭 늘려줄 것을 요청했다.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미국은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낮게 보았고, 오히려 군사원조를 늘려주면 남한이 북침을 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북한의 전면 남침에 제대로 대비하지도 못하면서 ‘북진통일’을 외치며 허세만 부리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남긴 교훈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미국·러시아·중국 등 주변 강대국들이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개입한다. 둘째, 한반도의 통일은 한쪽이 다른 쪽을 굴복시키는 전쟁으로는 불가능하며, 전쟁은 남북한에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만을 남길 뿐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통일은 평화적인 과정을 통해서만 추진되어야 한다. 셋째, 한반도의 통일은 미국·중국·러시아 등 아직도 한반도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주변 강국의 협조 없이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이 전쟁에 관계한 나라의 지도자와 국민이라면 한국전쟁이 남긴 이러한 교훈을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현실은 거꾸로만 가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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