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읽어드립니다
0
윤석열 대통령이 4월 29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여야 영수회담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발언을 굳은 표정으로 듣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4월 29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여야 영수회담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발언을 굳은 표정으로 듣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이봉현 | 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주 조선일보가 주최한 포럼에 3년 연속 참석해 축사했다. 한겨레도 매년 가을 시대적 의제를 잡아 국제포럼을 열고, 개막식에 정·관계 인사를 초대한다. 그런데 아무리 언론사라 해도 민간기업의 행사에 대통령이 ‘3년 개근’ 하는 건 정말 예외적인 일이다. 어느 당이 집권하건,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자리인 대통령이 언제, 어떻게 움직일 지에 대한 관례가 있어서 그렇다. 이걸 보고 “조선일보 대단하네”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이례적 상황이 무얼 보여주는 지 궁금증도 커진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2일 조선일보가 주최한 국제포럼의 개막식에 참석해 행사를 참관하고 있다. 조선일보 지면 갈무리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2일 조선일보가 주최한 국제포럼의 개막식에 참석해 행사를 참관하고 있다. 조선일보 지면 갈무리

둥근 헤드테이블에 다른 참석자와 앉아 있는 윤 대통령은 작아 보였다. 그가 신문사 간부와 청중들 앞에서 “전통과 권위의 정론지이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조선일보”라며 예년에 없던 극찬을 한 대목에선 조바심이 느껴졌다. 총선에서 대패한 이후 윤 대통령은 몰리고 있다. 192석 거대 야권의 파상 공세도 위협이지만, 치명적인 것은 지지해 준 보수층이 등을 돌리는 것이다. 이반의 조짐은 보수매체의 논조에서 드러나는데, 보수담론의 ‘장로회의’ 같은 이들이 손을 놓으면 윤 대통령의 발밑은 허물어진다.

광고

윤 대통령이 사면해 내보낸 국민의힘 후보가 패한 지난해 가을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를 즈음해 조선, 동아, 중앙 등 보수지의 칼럼과 사설에는 현 정권에 대한 경고, 실망, 짜증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양상훈(조선일보 주필)은 “윤 대통령은 안정적으로 (지지율이) 40%를 넘은 적이 없다. 윤 대통령 스타일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뜻”이라고 직격했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도 총선에서 완패하면 “남은 3년은 식물 정부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대중(조선일보 칼럼니스트)은 “레임덕이 문제가 아니다. 임기와 상관없이 물러나는 것만이 ‘선장없는 나라’의 혼란과 참담함을 면하게 하는 길”이라고까지 했다.

총선 뒤에는 힐난의 수위가 더 높아져, 이들이 윤 대통령과 ‘헤어질 결심’을 하고 있는가 싶은 상황이 됐다. 김현기(중앙일보 논설위원)는 “요즘 어느 모임에 가도 윤 대통령에 대한 불만·분노가 넘친다. 보수 인사들이 더 그렇다”며, 그나마 총선을 통해 건진 게 있다면 “‘아, 다음에는 이런 대통령을 뽑아선 안 되겠구나’란 각성을 유권자들이 진지하게 했다”는 것이라 한다. 선거 참패 뒤에도 검찰총장 패싱 인사, 영수회담 비선 논란, ‘안드로메다’식 납득 안되는 인사(최현철 중앙일보 논설위원) 등 실망스러운 일은 계속된다.

광고
광고

급기야 윤 대통령의 보수 정체성 마저 의심받는 상황이 된다. 영수회담 비선 논란과 박영선·양정철 하마평 등에 대해 박정훈(조선일보 논설실장)은 자신의 원칙을 관철하려 의사, 해병대까지 적으로 돌린 대통령이 “물밑에선 이재명 대표에게 ‘골프·부부회동’ 운운하며 손을 벌렸다니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라며 “윤 정권을 탄생시킨 정체성의 기본이 의심받는 순간, 충성 지지층마저 실망해 등을 돌릴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김건희 여사, 채 해병 순직 등 쌍특검 정국에서 보수매체는 윤 대통령에게 전향적 대응을 주문해 보지만 쇠귀에 경읽기이다. 김순덕(동아일보 칼럼니스트)은 ‘검사 위에 여사 나라, 부끄럽다’ 라는 칼럼에서 “남편 잘 만나서 수사도, 처벌도 안 받는 나라라니 과거 대통령 탄핵 때 외치던 ‘이게 나라냐’ 소리가 절로 나올 판” 이라고 개탄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윤 대통령을 세우는데 일조하고, 적극 방어해 온 보수매체가 이렇게 나오는건 이대로 가면 정권을 뺏긴다는 공포 때문이다. 정치개입이 노골화한 한국 언론환경에서 이들 매체의 가장 중요한 ‘목적함수’는 보수정권 재창출이고 민주당 집권 저지이다. 그러면 영향력이 커지고, 영향력은 독자 및 수입증대로 이어진다. 이정환(슬로우뉴스 대표)은 “보수언론에게 보수 정권의 대통령은 쓰고 버리는 말이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보수 기득권 세력의 아성은 공고하다. 이해관계가 맞을 때는 싸고 돌지만 도움이 안된다 싶으면 가차없이 말을 갈아탄다”고 한다. 그러기에 내내 인기 없는 대통령, 엇나가기만 하는 대통령을 두둔하다 같이 묻히는 ‘순장조’만은 피해야 한다. 판단은 기민해야 한다. 박근혜 정권이 질퍽일 때 우병우 (당시 민정수석)를 내치라며 경고해 온 조선일보는 2016년 10월 최순실 태블릿 사건이 터지자 즉각 박근혜를 ‘손절’ 한다. 다음날 ‘부끄럽다’는 제목을 단 조선일보 사설은 “대통령의 국정 운영 권능의 붕괴 사태”라 상황을 규정하고, 여당에서 탈당하고 거국총리를 임명하라고 대통령을 압박한다.

광고

다만, 윤 대통령의 임기가 3년이나 남은 게 이들을 망설이게 한다. 대안도 없이 헤어지는 건 민주당 집권을 돕는 일이다. 본격적인 손절은 아마도 이명박 정권의 박근혜처럼 여당 속 야당 인물이 부각될 때일 것이다. 보수매체는 그게 한동훈이든 나경원이든 띄우려 할 것이다. 그 전에 윤 대통령이 확 변하지 않는다면, 한 신문의 칼럼 문구처럼 그는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야” 할 것이다.

bh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