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화 | 연쇄창업가
지난 9일 서울시립 교향악단의 정기 연주회가 열린 잠실 롯데콘서트홀 무대에 피아니스트 손열음 대신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이 올랐다. 리허설 도중 건강 이상을 느껴 협연자를 교체해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공연 하루 전날 발생했다. 급박하게 대타를 뛰게 된 힐러리 한은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를 매끄럽고 우아하게 연주하며 관객들에게 뜻밖의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했다. 서울시향의 발 빠른 대처도 인상적이었지만, 올해부터 서울시향 지휘봉을 잡은 얍 판 츠베덴의 존재감 또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뉴욕에서 함께 활동했고,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서로에게 느끼는 모종의 신뢰감 같은 것이 이런 마법 같은 대타 역전 적시타를 가능케 하지 않았을까.
인재가 또 다른 인재를 부르고 그렇게 형성된 네트워크가 도시 경쟁력에 큰 동력이 된다는 사실은 새삼스럽지 않다. 세계화 시대 인재들에게 주요 거점 도시에 형성된 네트워크는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물적 토대가 된다. 서울 역시 그런 거점 중 하나가 되어 가고 있다는 조짐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영화 홍보나 공연을 위해서 서울을 찾더라도 잠시 찍고 도쿄 등으로 향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이제는 정말 좋아서, 개인 일정으로 도시 곳곳을 찾아 나선 셀럽들이 시민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흔해졌다. 이제 서울은 여러 설명이 필요 없이 그저 매력적인 도시가 된 걸까.
츠베덴이 뉴욕과 홍콩의 다음 행선지 중 하나로 서울을 선택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정식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가 이끄는 서울시향은 벌써부터 기대감을 갖게 한다. 레퍼토리도 다채로워지고 음향도 힘차고 풍부해졌다는 평가다. 단적으로 쇼스타코비치의 레닌그라드 교향곡 연주는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뚜렷이 갈렸는데, 논쟁이 될 만한 공연을 만들어 냈다는 것 자체가 서울시향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한 게 아닐까 싶다. 아마도 그런 도전을 보고 더 많은 인재들이 서울로 향하게 될 것이다.
최근 현물 상장지수펀드(ETF) 상장을 승인받은 이더리움의 개발자 비탈릭 부테린은 오래전부터 서울을 자주 찾았다. 2014년께 암호화폐 열기가 잠시 꺾였을 시절, 고양시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콘퍼런스에 강연차 방문했던 그가 행사장 구석에 털썩 주저앉아 코딩에 몰두하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이야기 나눈 게 엊그제 같은데 세계적 거물이 되어서도 여전히 비슷한 차림으로 서울을 자주 찾는다. 그런 그의 행보는 많은 개발자들이 서울에 주목하는 현상을 가져왔다. 그중 일부는 단지 관심만 가진 게 아니라 서울에서 기회를 찾고 싶다며 아예 짐을 싸 들고 왔다. 덕분에 프랑스며 캐나다에서 온 개발자들을 채용해 함께 일할 수 있었다. 그게 벌써 8년 전 일이니 팬데믹만 아니었다면 아마도 서울엔 더 많은 벽안 또는 구릿빛 피부의 개발자들이 뿌리를 내렸을지도 모르겠다.
매력적인 도시가 되고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어찌 보면 유행에 그치기 쉬운 일이다. 세계화는 거점 도시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한번쯤 낙점이 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도쿄와 홍콩이 그랬고, 싱가포르는 여전히 잘나간다. 문제는 그 흐름을 지키고 유지하면서도 삶의 터전으로서 안정성을 지키는 일이다. 도쿄는 여전히 세계화된 거점이지만 그 때문인지 세계로 향하는 일본인들의 역동성은 크게 줄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홍콩은 정치적 문제로 예전 같지 않고 싱가포르는 살인적인 물가로 살기가 팍팍해졌다는 아우성을 낳고 있다. 이제 서울 차례다. 그저 관심받기 위해 발버둥 치던 시절은 옛일이 됐고 서울로 향하는 발걸음이 크게 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좋은 두뇌들이 일하며 살고 싶은 도시를 만드는 일보다 올림픽 재유치 등 말 그대로 88년도 방식에 매몰된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이제 필요한 건 호객행위가 아니라 물관리와 객단가 증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