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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칼럼

좌절의 밤 그리고 위스키

등록 :2022-10-12 18:27수정 :2022-10-13 02:38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숨&결] 전은지 | 카이스트 항공우주공학과 교수

2017년 독일 항공우주센터(DLR)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할 때다. 자정이 다 된 시각 “똑똑” 누군가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이 시간까지 연구소에 남아 있는 사람은 없을 텐데. 흠칫 놀라 방문을 바라보는데, 문이 빼꼼히 열리더니 누군가 머리를 내민다. W 박사였다.

“너 안 가고 뭐 해?”

“그러는 너는 안 가고 뭐 하는데?”

우리는 같은 질문을 서로에게 하며 웃고 말았다. 그는 연구실로 들어와 의자에 앉더니, 지난 한달 동안 해오던 실험 준비가 방금 모두 날아갔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실험에 사용할 비행모사체가 부서졌고, 이것을 다시 주문해 똑같이 세팅하려면 한달도 더 걸릴 것이라는 얘기였다. 마침 나도 할 말이 있었다. “지난 한달간 끔찍하게 엉켜버린 코드를 한줄 한줄 확인해서 해결했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두시간 전에 확인하니 같은 오류가 나와. 지난 한달 나는 무슨 짓을 한 걸까.”

우리는 말없이 한참을 시무룩하게 앉아 있었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며 ‘1분만 기다리라’던 그가 곧 위스키와 잔 두개를 들고 나타났다. 아니 연구소에서 위스키를 마셔도 되나? 눈을 동그랗게 뜬 내게 그가 말했다. “너 몰라? 이 연구소 모든 방 책상 깊숙이에는 위스키가 숨겨져 있어. 이런 ‘좌절의 밤’을 대비한 비상용 위스키 말이야.”

그와 딱 한모금씩 위스키를 나눠 마신 뒤 퇴근길, 그간 수없이 보내온 좌절의 밤들을 떠올렸다.

박사과정 1년차 때 일이다. 도서관에 혼자 남아 밤새 ‘점성유체’ 숙제 네 문제 가운데 마지막 한 문제와 낑낑대고 있었다. 한 발자국만 더 다가가면 풀릴 것 같은데…. 사흘 동안 나를 지옥에 빠뜨렸던 그 문제는 동이 틀 때까지도 풀리지 않았고, 결국 못 푼 채 숙제를 제출하고 화장실로 달려가 엉엉 울고 말았다.

그런 밤들을 무수히 보내야 과학자가 된다, 고 선배들이 말했다. 그 말을 이제는 이해한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책상 앞을 돌멩이처럼 지키고 있던 날들이 있었기에, 지금 과학으로 밥을 먹고 산다. 하지만 상황이 크게 변한 것은 아니다. 그때 풀지 못했던 점성유체 마지막 문제는 풀 수 있지만, 여전히 내 책상에는 풀지 못한 문제들이 잔뜩 쌓여 있고 종종 좌절의 밤을 헤매곤 한다.

여러 나라 연구기관을 떠돌다 40대 초반이 돼서야 한국 대학에 자리를 잡고 연구팀을 꾸렸다. 어린 동료들은 종종 시무룩한 얼굴로 죄인처럼 말한다.

“잘 안됩니다.”

그들에게서 과거 나의 얼굴을 본다. 잘 안되는데 어디서부터 잘 안되는 건지는 모르겠는, 그래서 좌절에 빠진 나 말이다. 그들에게 이야기하곤 한다.

“잘 안되는 게 당연하지. 쉽게 되면 누군가 이 문제를 풀었지 우리가 풀게 그냥 뒀겠니? 처음엔 잘 안되는 게 당연한 거야. 두번째도 세번째도. 언제 잘될지는, 해보면 알겠지. 자, 처음부터 어떻게 했는지 들어볼까?”

스스로의 두려움도 해결하지 못한 내가, 어린 동료의 두려움에는 괜찮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그런 것이다. 영원한 좌절도 영원한 두려움도 없다. 문제는 잘 풀리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지금 선택한 방법으론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 방법으로 풀리지 않는 것을 안 것도 성과다. 풀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된다.

올해 대한민국은 우리만의 기술로 최초 우주발사체 누리호 발사를 성공시켰다. 그리고 지금 한국 최초 달탐사선 다누리가 달을 향해 가고 있다. 항공우주공학자로서 가슴 설레며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 수많은 과학자가 겪었을 좌절의 밤도 생각한다. 어쩌면 과학과 공학의 방점은 누리호와 다누리의 성공 그 자체보다, 수많은 과학자가 좌절과 두려움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해온 그 과정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 연구실 서랍 맨 아래에는 반쯤 빈 위스키 한병이 있다. 나와 동료들이 겪을 좌절의 밤을 위해 구비해둔 것이다. 어느 날 새벽 나는 홀로 또는 동료와 위스키 한모금을 나누어 마실 것이다. 맞이한 좌절을 또렷이 응시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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