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파우저 | 언어학자
한국 대통령 선거 개표 방송을 지켜봤다. 근소한 차이를 예상했지만, 결과는 훨씬 더 근소했다. 유력, 확실, 당선 표시가 차례로 윤석열 후보 옆에 붙더니 당선 결정 후 곧장 ‘당선인’이라는 호칭이 따라붙었다. 오늘은 바로 이 ‘당선인’에 대한 이야기다.
‘당선인’ 호칭을 듣고 볼 때마다 너무 거슬린다. 우선 어감 때문이다. 20대 초반 한국어를 외국어로 배우기 시작한 내게는 한국어 원어민들 같은 내재화된 언어 감각이 없다. 외국어를 자주 사용하고, 그 언어로 일상생활을 하면 외국인이라도 어느 정도 그 언어의 감각을 발휘할 수는 있지만, 아무래도 원어민들의 감각과는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나의 한국어 감각의 한계를 인정한다. 그럼에도 ‘당선인’은 말할 때 흐름이 어색해서 아무리 듣거나 읽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개인적 문제일 수도 있지만, 나만의 사정은 아닌 것 같다.
싫은 마음에는 언론을 통해 빠르게 보급된, 인위적 언어 변화의 산물이라는 점에 대한 반발도 작용한다. 언어는 늘 변한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언어를 받아들인다. 변화 요인은 다양하지만 세대 차가 대표적이다. 기성세대와 차별화된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젊은 세대는 사회 변화의 최전선에서 새로운 언어를 부담 없이 생산한다. 이들이 만든 언어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동안 그 밑의 또 다른 젊은 세대는 어느새 새로운 말을 만들어내고, 이로써 언어 변화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대중문화, 소비문화 역시 언어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젊은 세대들이 만들어내는 변화야말로 가장 쉽고 빠르게 정착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당선인’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민주적 절차로 치러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의 시작은 1987년부터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당시 대통령에 당선된 후보는 ‘당선자’였다. 그 이후에도 줄곧 ‘당선자’는 ‘당선자’였다. ‘당선자’가 ‘당선인’이 된 건 언제부터일까. 알아보니 2007년 이후부터다. 이명박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당선자’가 아닌 ‘당선인’으로 불러달라고 한 뒤 언론은 이를 받아들였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자연스러운 언어 변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특정 정치 세력의 요청에 의해 채택, 보급된 단어다. 나의 반발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는 별개로 특정 정치 세력과 언론이 언어의 변화를 주도하는 행위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 ‘당선자’ 대신 ‘당선인’이었을까. 끝에 붙은 ‘놈 자’(者) 때문이다. ‘자’는 품격이 낮아 대통령에 맞지 않으니 ‘사람 인’(人)으로 바꿔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자’를 사용하는 수많은 호칭 주체들이 품격에 맞지 않는다고 바꾸자고 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나는 스스로를 ‘독립학자’로 소개한다. 미국 학계에서 자주 사용하는 ‘인디펜던트 스칼러’(independent scholar)를 한국식으로 바꾼 것이다. 품격 운운하는 논리에 따르면 ‘독립학자’가 아닌 ‘독립학인’이어야 한다. 어감이 아주 이상하다. ‘자영업자’ 대신 ‘자영업인’, ‘노동자’ 대신 ‘노동인’도 그렇다.
마땅치 않은 점은 더 있다. ‘당선인’은 언어 문제를 초월해 민주주의 정신에도 어긋난다. 대통령을 뽑는 시민은 ‘유권자’다. 시민은 헌법의 원천이니 대통령보다 위에 있다. ‘당선자’가 품격 문제로 ‘당선인’이 되어야 한다면 그보다 높은 ‘유권자’는 마땅히 ‘유권인’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대통령의 품격만 따져 엄연한 말을 바꾼 것은 극도의 권위주의적 발상이다.
한국사에서 1987년 대선은 직선제 개헌 후 치른 첫 선거다. 길고 어려운 민주화 운동의 값진 성과다. 비록 정권 교체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한국 역사상 최초로 새로운 대통령을 직접선거를 통해 뽑았다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이 때문에 그 이전까지 쓸 일이 거의 없던 ‘당선자’라는 호칭은 최초로 치러진 공정한 대선의 언어적 산물, 아니 선물이다. 그 이후로 5년에 한번씩, 취임 전 두달 동안 새로운 대통령을 부르는 ‘당선자’라는 호칭은 한국 사회에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고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다.
그런 맥락을 무시하고, 특정 정치 세력의 요청에 의해 민주화를 상징하는 ‘당선자’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한 ‘당선인’은 내 눈에는 마치 민주주의를 존중하지 않는 것처럼 읽힌다. 이번에 바로잡는 건 어렵겠지만, 5년 후 개표 방송부터는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상징적 호칭인 ‘당선자’를 다시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