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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인 칼럼] 피할 수 있었던, 피하지 못한 비극

등록 :2022-03-06 15:01수정 :2022-03-06 15:23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는 관점은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이 기존 세력권의 현상 변경에 대해 더욱 신중하고 우크라이나 내정이 단합된 모습을 보이며 지도자의 위기관리 능력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이번 비극은 피할 수 있었다. 이 세가지 변수야말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우크라이나 사태의 중대 교훈이 아닌가 한다.
지난 3일(현지시각) 러시아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폐허가 된 우크라이나 하르키우(하리코프) 시내의 건물과 차량의 모습. 2월24일 전쟁 발발 이후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에 대한 러시아군의 공세를 거세지며 사상자와 민간 시설 피해가 크게 늘고 있다. 하르키우/AFP 연합뉴스
지난 3일(현지시각) 러시아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폐허가 된 우크라이나 하르키우(하리코프) 시내의 건물과 차량의 모습. 2월24일 전쟁 발발 이후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에 대한 러시아군의 공세를 거세지며 사상자와 민간 시설 피해가 크게 늘고 있다. 하르키우/AFP 연합뉴스

문정인|세종연구소 이사장

2월24일 마침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단지 기동훈련일 뿐 침공은 없을 것이라는 푸틴의 발언은 허언으로 끝났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영토와 주권을 짓밟고 유럽의 평화를 위협하는 동시에 국제법과 국제질서를 파괴하는 반문명적인 행보를 보였다. 우크라이나의 저항, 국제사회의 반발과 응징은 거세다. 그러나 푸틴은 이에 ‘핵전력 경계태세’로 맞서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비극은 약육강식의 무정부 질서가 국제정치의 본질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번 사태의 일차적 원인은 냉혹한 독재자의 피해망상적 민족주의와 군사모험주의에 있다. 이를 민주적으로 견제하지 못한 러시아의 정치체제도 한몫했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은 그 책임에서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대소 봉쇄 전략의 창안자인 조지 케넌에서 헨리 키신저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대표적인 현실주의자들은 러시아의 세력권을 인정해야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이 담보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특히 2008년 부쿠레슈티 나토 정상회의에서 당시 부시 행정부가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공식적으로 추진하자, 키신저는 줄곧 이 두 국가를 나토에 가입시키지 말고 중립국으로 남게 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서방의 나토 동진을 러시아가 현상 변경의 신호탄으로 간주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스티븐 월트 하버드대 교수는 침공 한달 전인 1월19일 미국 시사전문지 <포린 폴리시> 기고문에서 “미국의 자유주의 환상이 우크라이나 위기를 가져왔다”고 진단하며 미국과 서방의 공세적 가치 외교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촉발할 것으로 보았고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그에 따르면 나토의 동진 확대는 안보상 이유에서 추진됐지만 실제로는 자유와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가치 지향성에 의한 것이었고, 푸틴이 이러한 움직임을 러시아의 고립과 자신의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 초강수 군사대응으로 나설 것이라는 것은 다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그러나 세력권 정치는 이번 사태의 필요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국내정치가 충분조건으로 작용했다. 오늘날의 우크라이나는 강대국 분할통치의 결과물이다. 1922년 소련에 편입된 이후 우크라이나에는 두개의 이질적 세력이 존재해왔다. 서부에는 가톨릭을 믿고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며 유럽적 정체성을 선호하는 다수가, 동부 돈바스 지역에는 러시아 정교회를 믿고 러시아어를 사용하며 슬라브 정체성을 강조하는 소수가 거주한다. 이 두 이질적 집단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외세 개입의 빌미를 제공했다.

따지고 보면 이번 사태는 2014년 위기의 연속선상에 있다. 유럽과의 통합을 강조하는 유로마이단 세력이 친러 노선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에게 반발, 시민혁명을 통해 실각시키자 러시아는 크림반도 합병으로 맞섰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나토 가입 조건을 만족시키고자 우크라이나 정부는 돈바스 지역에서 친러 반군 세력 축출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이에 러시아는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사개입이라는 극단적인 대응을 택했다. 침공 직전 이들 분리주의 세력이 세운 돈바스 지역의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한스크인민공화국(LPR)을 러시아가 독립국가로 승인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여기에 지도자의 오판은 결정적인 촉발변수가 되었다. 푸틴의 광기 어린 침공 결정도 문제지만,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미숙한 초기 대응 역시 문제시된다. 그는 2019년 대선에서 ‘평화와 부패척결’이란 기치 아래 승리했다. 러시아 침공 후에는 현장에서 군과 주민들과 일체가 되어 저항하는가 하면 국제사회에 적극적인 외교를 전개하면서 안과 밖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 전쟁 예방이라는 위기관리에는 실패했다. 자신의 지지자에게는 나토 가입, 러시아에는 중립화 노선, 그리고 서방에는 핵무장론을 주장하는 등 혼란스러운 메시지로 위기 상황을 증폭시켰는가 하면 외부에는 러시아의 침공 임박을 알리며 무기 지원을 요청하면서도 정작 주민에게는 침공 가능성이 작으니 안심하라고 말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사태를 어렵게 했다. 연루의 위험을 우려하는 미국과 나토의 군사적 지원 가능성에 대한 과도한 기대 또한 패착의 하나였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는 관점은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이 기존 세력권의 현상 변경에 대해 더욱 신중하고 우크라이나 내정이 단합된 모습을 보이며 지도자의 위기관리 능력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이번 비극은 피할 수 있었다. 이 세가지 변수야말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우크라이나 사태의 중대 교훈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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