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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민의 탈인간] 바위로 계란 치기

등록 :2022-02-27 17:57수정 :2022-02-28 02:31

김한민 | 작가·시셰퍼드 활동가

나는 2000년대 초, 페루에서 2년을 살았다. 휴가 때 산악 도시 우아라스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해발 3천미터의 고산지대로 인근 산봉우리의 만년설을 보는 코스가 유명했다. 그때 처음 빙하를 밟아봤다. 10년 뒤 취재차 같은 곳을 재방문했을 때, 난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과거 분명히 빙하였던 곳이 녹아 검은 바위가 드러나 있었다.

3년 뒤 2015년, 바로 그 우아라스에 사는 농부이자 관광 가이드 사울 루시아노 리우야가 독일 최대의 전력회사 에르베에(RWE)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에르베에는 유럽에서 탄소배출이 가장 많은 기업 중 하나인데, 우아라스의 융빙·홍수 등을 초래한 기후변화에 원인을 제공했으니 책임지라는 내용이었다. 사울은 이 기업이 1988~2015년 배출한 온실가스의 비율(전세계의 0.5%)에 맞춰, 거주민들이 부담할 손해복구비용의 0.5%(약 2천만원)를 배상하라고 요구했다. 독일 법에 “재산 침해를 받으면 침해자에게 책임을 물 수 있다”는 오래된 규정이 있음에 착안한 전략이었다. 소송은 독일 지방법원에서 기각됐으나, 2017년에 고등법원에서 수용됐다. 현재 코로나19로 추가 증거 제출이 연기돼 최종 판결이 유예된 상황이지만, 결과와 무관하게 큰 파장을 일으켰다. 기후위기의 원인·결과가 국경을 초월함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탄소배출로 지구 가열에 기여했다면 배출원의 소재지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지난해 2월, 베트남에 석탄화력발전소를 건립하는 두산중공업을 상대로 벌인 우리 기후 활동가들의 시위는 너무도 이해하기 쉽다. 정부가 명백히 탄소중립을 천명했고 두산도 이에 적극 동참하기로 선언해놓고서, 최악의 탄소배출 기계인 석탄발전소라니! 서울에 짓든 베트남에 짓든 반대 명분은 충분했다. 그런데도 두산은 최소한의 성찰은커녕, 활동가들을 고소했다. 두산의 ‘그린 워싱’에 항의하며 본사 앞 조형물에 녹색 칠을 한 걸 문제 삼았고, 재판부는 대기업의 손을 들어줬다. 활동가들이 수성 스프레이 칠도 지웠지만, 조형물 스크래치 등을 이유로 벌금 500만원이 선고됐다. 이에 그치지 않고 두산은 “임직원의 정신적 충격” 등을 들어 1840만원 규모의 소송을 별도로 제기했단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그 발전소가 향후 수천만톤씩 배출할 탄소를 생각하면 미래세대에 사죄해도 모자라고, 먼저 고소당해도 싼데 부끄럽지도 않나!

기후위기의 원인은 인류 활동이지만, 사회적 책임이 월등히 많은 나라·기업이 존재한다. 고로, 시민운동이 그런 정치인과 대기업을 겨냥하는 건 당연하다. 과거에 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계란으로 바위 치기’ 아닐까 걱정했다면, 지금은 ‘계란을 짓밟겠다고 벼르는 바위’에 대비해야 한다. 기후만 위기인 게 아니라 모든 가치가 엉망진창 전도된 시대, 가해자가 버젓이 피해자 행세를 하는 분위기 속에서, 바위들의 반격이 몰려온다. 기후 이슈 말고도, 쿠팡 같은 거대 기업도 노동인권 현실을 비판한 언론을 고소하고, 대통령도 일개 시민을 고소한다.

선거철마다 느끼지만 ‘괜찮은 적’이 있다는 건 큰 행운이다. 치졸하고 쩨쩨한 적과 싸우면 수준만 동반 추락한다. 어찌 됐든 기후 운동은 이런 위협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기후 소송은 전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증가세이다. 항상 기후 정의의 승리로 끝나진 않지만, 유의미한 판례가 쌓이면서 기준도 변하고, 승소도 쌓일 것이다. 겉으로 이미지 관리만 하고 실제론 지구를 망치는 이들은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가 환경오염이든, 인권 침해든, 허위 광고든, 또는 원고가 한국인이든, 페루인이든, 언제 어디서 누구로부터 소송장이 날아올지 모르니. 가장 현명한 방법은 지금이라도 정직하게 변하는 것. 역사의 적이 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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