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남북 합의문서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합의’가 바로 기본합의서다. 두 세기에 걸친 분단사에 남과 북이 합의한 유일무이한 남북관계 규정인 기본합의서 서문의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것을 인정”한 ‘통일 지향 특수관계’론이 핵심이다.

1992년 2월 6차 남북 고위급회담을 위해 북한을 방문한 정원식 수석대표(당시 국무총리) 등 남쪽 대표단이 김일성 주석(오른쪽)을 예방해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은 통일부가 2021년에 펴낸 <남북대화 50년>에 실린 것이다.
1992년 2월 6차 남북 고위급회담을 위해 북한을 방문한 정원식 수석대표(당시 국무총리) 등 남쪽 대표단이 김일성 주석(오른쪽)을 예방해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은 통일부가 2021년에 펴낸 <남북대화 50년>에 실린 것이다.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 협상에 성공한 고위급회담 대표단을 편하고 빠르게 평양으로 모셔 오라고 개성으로 헬기를 띄웠다. 1991년 12월13일 오전 9시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남북기본합의서 서명식을 하고 오후 4시40분 판문점을 통과한 고위급회담 대표단은 개성에서 헬기로 갈아타고 평양으로 직행했다. 김일성 주석은 이들을 ‘주석궁’(현 금수산태양궁전)으로 불러 만찬을 함께 했다. 김 주석이 연형묵 정무원 총리 등 고위급회담 대표단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은 다음날치 <노동신문> 1면 머리로, 그 밑엔 남북기본합의서 전문이 크게 실렸다. 김일성은 “대표단 성원들이 조국통일의 밝은 전망을 열어놓은 데 큰 기여를 하고 돌아온 데 대하여 커다란 만족을 표시하셨으며 그들의 성과를 축하하셨다”고 <노동신문>은 전했다.

한·소 수교(1990년 9월30일)로 대외환경이 크게 나빠진데다 유엔에 ‘떠밀려’ 가입(1991년 9월17일)한 지 석달 만인 1991년 12월의 김일성은 남북기본합의서를 손에 쥐고 왜 이리 좋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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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기’를 돌려보자. 김일성은 연형묵 등 대표단을 만나 “이 문서는 천군만마보다 위력하다. 이로써 적들의 발목을 잡았다”고 평가했다고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정세현의 통일토크>에 적었다. ‘적들의 발목을 잡았다’는 김일성의 표현을, 정세현은 흡수통일의 위험을 피할 수 있게 됐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서문과 본문 25개 조로 이뤄진 남북기본합의서의 1~4조가 ‘흡수통일 배제’를 가리키며, 이 4개 조항이 북이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을 통해 진정으로 얻으려 한 것이라고 정세현은 풀이했다. 고위급회담 남쪽 대표였던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기본합의서 1~4조를 두고 “이걸 지키는 건 남과 북이 상당 기간 평화공존한다는 뜻이어서 대단히 중요한 조항”이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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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합의서 1~4조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1조), “남과 북은 상대방의 내부문제에 간섭하지 아니한다”(2조), “남과 북은 상대방에 대한 비방·중상을 하지 아니한다”(3조), “남과 북은 상대방을 파괴·전복하려는 일체 행위를 하지 아니한다”(4조)가 그것이다. 요약하면 ‘체제 인정·존중’(1조), ‘내정 불간섭’(2조), ‘비방·중상 금지’(3조), ‘파괴·전복 행위 금지’(4조)다.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건물 폭파(2020년 6월16일)라는 비극으로 이어진 ‘대북전단 사태’가 웅변하듯, 북이 지금도 매우 중시하는 내용이다.

사실 당시 북한 당국은 동서독 통일, 소비에트연방(소련) 해체, 동유럽 사회주의국가의 연쇄 체제 전환에 맞닥뜨려 체제붕괴와 흡수통일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북은 여덟 차례의 예비회담과 1~5차 고위급회담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흡수통일’ 우려를 제기했다. “통일은 절대로 어느 일방에 의한 통일로 되어서는 안 됩니다”(1차 회담 기조연설, 1990년 9월5일), “동서독식의 통일과정을 모방하려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인 것…”(2차 회담 기조연설, 1990년 10월17일), “무슨 ‘승공’이니 ‘흡수통합’이니 하는 망상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 대결만을 추구한다면…”(4차 회담 기조연설, 1991년 10월23일) 따위가 대표적이다. 통일부는 당시 북의 대남정책이 “남한에 흡수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따른 “수세적 체제생존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됐다고 <하늘길 땅길 바닷길 열어 통일로>(통일노력60년 발간위원회, 2005년)에서 평가했다. 고위급회담 북쪽 단장인 연형묵 정무원 총리는 기본합의서 채택 이후 열린 6~8차 회담에선 ‘흡수통일 우려’를 제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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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냉전질서의 비대칭적 해소에 따른 치명적 위기 상황에 맞닥뜨려 ‘흡수통일 배제’라는 전략 목표를 설정한 북은 기본합의서 협의 과정에서 많은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남북기본합의서와 (화해·불가침·교류협력) 3대 부속 합의서 내용의 90% 이상은 남쪽이 제안한 내용이라고 고위급회담 남쪽 대표였던 이동복은 회고록 <통일의 숲길을 열어가며>에 적었다. 예컨대 남과 북이 기본합의서에 합의·서명한 5차 고위급회담 직전까지 이견을 좁히지 못한 ‘미합의 8대 쟁점’은 모두 남쪽이 제안한 것이다. ‘미합의 8대 쟁점’은 “정전상태의 평화상태로의 전환, 해상 불가침 경계선, 불가침의 이행보장장치, 서울·평양 상설연락사무소 설치, 언론·출판물의 상호 개방, 통행·통신·통상의 3통위원회 설치, 유엔헌장에 따른 분쟁의 평화적 해결, 남북 양쪽이 각각 체결한 기존 협정과의 관계” 등이다.

이는 남과 북의 협의와 그 결과가 한쪽으로 크게 기울었음을 방증한다. ‘흡수통일을 막으려다 너무 많은 것을 내줬다’는 반발·불만이 북 내부에서 나올 만한 상황이었고, 실제 그런 일이 있었다. 고위급회담 북쪽 대표였던 김영철 조선인민군 소장은 남쪽 대표인 박용옥 육군 소장한테 “이것은 당신네 협정이지 우리 협정이 아니다”라고 불평했다고 돈 오버도퍼는 <두 개의 한국>에 적었다.(이 ‘김영철’이 2018~2019년 남북·북-미 정상회담 과정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대리인 구실을 한 그 ‘김영철’이다.) 이런 ‘아픔’ 탓인지 북은 지금껏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일을 기념하지 않으며, 당국회담 합의문서에 ‘기본합의서’를 언급하기를 조심스레 피해왔다.

그래서 기본합의서는 화려한 말잔치에 불과한 ‘죽은 문서’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역대 남북 합의문서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합의’가 바로 기본합의서다. 두 세기에 걸친 분단사에 남과 북이 합의한 유일무이한 남북관계 규정인 기본합의서 서문의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것을 인정”한 ‘통일 지향 특수관계’론이 핵심이다.

기본합의서 서문의 “통일 지향 특수관계” 규정은 힘이 세다. 남과 북의 당국은 기본합의서 채택 이후 이 규정을 일관되게 적용하고 있다. 남북교류와 관련한 것이라면 민관 불문하고 압도적 규정력을 발휘한다. 전쟁과 분단으로 점철된 남과 북의 간난신고의 ‘따로 또 같이’ 여정을 비추는 꺼지지 않는 등불이다. 이런 식이다.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남북왕래에 ‘여권’을 신분증명서로 쓰지 않는다. 남북교역에 ‘국경통과세’라 할 관세를 물리지 않는다. 남북교역은 수출입 통계에 넣지 않는다. 대북 인도적 지원은 대한민국 정부의 ‘공적개발원조’(ODA)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대한민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유럽연합(EU) 등이 개성공단에서 만든 물품을 한국산으로 인정해주는 것이나, 올림픽 등 국제스포츠경기에서 별개의 유엔 회원국인 남과 북이 ‘단일팀’을 꾸려 참가하는 걸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등이 허용·환영하는 건 기본합의서 서문 규정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정·지지를 웅변한다. 남과 북이 서로를 ‘외국’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통일 지향 특수관계” 규정을 30년째 일관되게 견지·적용해온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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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귀중한 기본합의서를 두고 대한민국은 국회의 동의를 거쳐 대통령이 비준하는 절차를 밟지 않았다. 1992년 2월17일 기본합의서에 노태우 대통령이 서명하고 국무총리와 모든 국무위원이 부서해 대통령령으로 관보에 싣는 걸로 공식 절차를 마무리했다. 결과적으로 기본합의서에 법적 구속력을 부여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북쪽이 조선노동당 중앙위 6기19차 전원회의(1991년 12월24일)와 중앙인민위원회·최고인민회의상설회의 연합회의(1991년 12월26일)를 거쳐 김일성 주석의 비준을 마친 사실과 극적으로 대비된다.

대한민국이 남북 정상회담 합의(6·15 공동선언, 10·4 정상선언, 4·27 판문점선언, 9·19 평양공동선언)를 국회 동의를 거쳐 비준하지 않는(또는 ‘못하는’) ‘악습’의 선례다. 정권교체 때마다 대북정책의 승계·단절을 둘러싼 논란과 ‘남남갈등’ 격화의 불쏘시개 구실을 하는 중대한 ‘입법 미비’ 상황의 지속이다. ‘적이자 동반자’라는 형용모순 관계인 북을 대하는 대북정책과 관련한 최소한의 합의 기반이자 기준선 구실을 할 남북 정상선언 비준동의 등 제도화 절차를 더는 미루지 말아야 할 까닭이다.

이제훈 |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1993년 한겨레에 들어와 1998년부터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사업의 시작과 중단, 다섯 차례의 남북정상회담, 여섯 차례의 북한 핵시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3세 승계’, 두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 사상 첫 남·북·미 정상 회동 등을 현장에서 취재·보도해왔다. 반전·반핵·평화의 한반도와 남북 8천만 시민·인민의 평화로운 일상을 꿈꾼다. nom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