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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칼럼

실패에 이르는 길

등록 :2022-01-02 17:46수정 :2022-01-03 02:01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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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김진철 | 책지성팀장

찬 바람 드센 아침이었다. 소방서에서 아파트 화재 사건을 확인하고 경찰에 사실부터 파악했다. 20대 자매 중 한명은 숨졌고 한명은 중태에 빠졌다. 화상 전문 병원이 있는 서울 서쪽과 담당 경찰서와 사건 장소가 있는 동쪽을 분주히 오갔다. 검게 그은 주검을 부검하는 유리창 너머에서 형사와 옥신각신했고 자매의 유족과 지인을 만나기 위해 아파트단지와 경찰서 앞마당에서 전전긍긍했다.

자매의 남자친구가 용의선상에 오르고 화재 당시 외출한 부모가 의심받고 자매가 다투다 불을 냈다는 뜬소문이 퍼졌다. “빨리 기사 써서 보내라”는 선배 기자의 엄한 독촉에 택시 뒷자리에서 휘갈겨 경찰서 팩스로 보낸 기사는 지면에 실리지 않았다. 더듬거리며 찾아낸 사실의 조각들이 허공으로 사라지는 듯한 모습을 보며 허무해졌다. 그러나 취재 결과를 바탕으로 보도 여부를 판단할 따름이었다. 잇단 취재 지시에 몸을 움직였고 기사화 결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을 발굴해내는 것임을 배웠다. 그 겨울, 나는 수습기자였고, 강동 아파트 화재 사망 사건은 ‘미제’로 끝났다.

같은 사건이 오늘 발생했다면 어땠을까. 수습기자 교육용이 아닌 한 언론의 관심을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온갖 음모론과 풍문이 확산됐을지 모른다.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사망자의 남자친구는 조리돌림당하고, 자매를 두고 영화관에 간 부모에게는 의혹의 꼬리표가 붙고, 아버지가 운영하던 동네 병원은 문을 닫아야 했을지 모른다. 자매가 평소 자주 다퉜다는 이웃 이야기가 궁금증을 자아내고, 안방 침대에서 흡연한 언니와 안방에 불이 났는데 뒤늦게 대처한 동생의 관계에 얄팍한 호기심이 넘나들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기사를 썼을 것이다. 동생과 만난 지 보름도 되지 않아 연인이라고 하기 어려운 남자는 뚜렷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영화관에는 가족이 모두 함께 갈 계획이었지만 자매는 부모가 오붓한 시간을 보내길 바랐다. 자매는 가끔 다퉜지만 여느 형제자매의 관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그날 특별히 다툴 이유도 없었다. 언니가 흡연한 결과 담뱃재가 어딘가에 숨어 있었고 발화는 일정한 시간 뒤 삽시간에 이뤄졌으며 물바가지를 들고 나타난 동생은 언니를 구하려다 숨진 것으로 추정됐다.

모든 것을 보도할 수 없고 모든 것을 보도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취재는 최대한 다 해야 한다. 취재나 보도 모두 선택의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취재 없이 보도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위험한 일이다. 소셜미디어 시대에 공론장이 활발히 작동할 필요조건이 주어졌다면, 공론장이 제대로 작동할 충분조건을 갖추도록 사실을 발굴해 공급할 책무는 언론에 있다. 알량한 선입견에 바탕을 둔 섣부른 판단으로 취재마저 손 놓는다면 레거시 미디어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소셜미디어가 뒤흔드는 공론장이 혼탁하다 한들, 이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부적절하다. 문제는 레거시 미디어에 있다.

진실 탐색의 과정은 실패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사실을 그러모아 확인하고 진실을 향해 한 뼘이라도 다가가려는 노력을, 언론은 경주해야 한다. 정치적 올바름이나 대세가 된 새 가치에 따라서건, 자의식에서 비롯한 피해의식과 소극적 방어의 차원에서건, 혹은 기술적 자원 배분의 문제에서건, 취재의 가능성조차 스스로 제한하는 건 언론이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지레짐작으로 선택하는 손쉬운 결정이며 게으른 자기부정일 뿐이다. 사실 탐색 대신 ‘받아쓰기’에 머물며 자기 위안하는 엉터리 저널리즘에는 “언론이 공론장으로서 사실을 전달해 더 나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은 환상”(촘스키)이라는 비판조차 아깝다. 거기까지 가지도 못하고 있다. 실패하지 않으려 함으로써 실패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언론의 행태가 문제적일 뿐이다.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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