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식 징병제는 프랑스혁명 이후 등장한 근대의 산물이다. 그 전까지 전쟁은 소수의 귀족과 용병들 몫이었다. 하지만 근대 국민국가가 출현하고 상비군 제도가 마련되면서 각 나라는 신체가 건강하고 일정한 나이에 해당하는 모든 국민에게 병역을 부과하는 형태로 병력 충원 제도를 바꿨다.

징병제는 단지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었다. 동원된 병사들에게 근대적 생활 방식과 국가 이념을 주입하고,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수단이었다. 탈냉전과 군사적 갈등 감소로 징병제를 채택했던 많은 나라가 모병제로 전환하고 있다. 최근 국내의 한 방송사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팩트북’에 실린 각국 병역제도 현황을 재분류해 ‘징병제 66개국, 모병제 121개국’이라는 집계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이런 세계적 흐름에도 전쟁을 겪고 북한과 군사적 대치 상태를 이어온 우리에게 모병제는 먼 나라 얘기였다. 2000년대 들어 남북 화해라는 시대 가치와 슬림화·첨단화라는 군사적 지향이 접점을 찾으며 모병제 전환이 논의되기 시작했지만, 그때마다 ‘북한군 120만명에 대처하려면 최소 50만명은 있어야 한다’는 논리에 밀려 힘을 받지 못했다. 일각에선 모병제가 부유층의 지원 기피로 결국엔 ‘가난한 자들의 군대’를 만들 것이라고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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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분위기도 바뀌고 있다. 지난달 15일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한국형 모병제’를 공약으로 발표한 데 이어 24일엔 이재명 민주당 후보가 ‘선택적 모병제’를 내놨다. 심 후보의 모병제가 징·모병 혼합제를 거쳐 2030년 완전 모병제 전환을 목표로 한다면, 이 후보는 징집병 규모를 지금의 절반인 15만명으로 축소하되, 모병을 통해 전투부사관 5만명과 군무원 5만명을 충원하자는 구상이다. 모병제 공약은 국민의힘 경선 후보였던 홍준표 의원도 내놓은 바 있다.

병역제도를 둘러싼 최근의 기류 변화는 군축론이나 평화주의 같은 가치들과 별 관계가 없다. 징집 연령층의 감소로 현재 병력 규모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진데다, 사병 봉급의 지속적 현실화로 징병제 유지에 따른 비용 절감 효과도 미미해진 탓이다. 어떤 지고한 이상과 가치도 현실의 ‘머릿수’만큼 힘이 셀 순 없다. ‘인구절벽’이 모든 것을 바꾸고 있다.

이세영 논설위원 mon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