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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행복하지 못한 선진국

등록 :2021-09-14 18:30수정 :2021-09-15 02:33

한국적 자살 현상의 배경에는 양극화 속의 빈곤, 극심한 노인 빈곤, 노동 시장의 이원화와 불안 노동의 증가, 그리고 노동 시장 진입 실패자의 증가 등이 있지만, 보통 개개인의 경우에 중요한 원인으로 떠오르는 것은 무엇보다 타자, 사회와의 ‘관계’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박노자ㅣ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살면서 늘 느끼는 것은, 이 두 나라는 생각보다 비슷한 구석이 많다는 것이다. 둘 다 20세기 중반에 바야흐로 본격적 산업사회 단계에 접어든 후발 발전 국가들이고, 둘 다 국가 주도의 공업화와 권위주의를 아프게 경험했다. 러시아에서도 한국에서도 여전히 상당수의 도시민은 농촌에 뿌리를 두고 있는 1~2세 주민들이다. 그래서인지 양쪽 모두에서 ‘남자들끼리’ 음주를 즐기고, 목욕탕에서 요담을 나누는 ‘남성 문화’를 종종 목격할 수 있다.

군사적 총동원의 경험을 가진 사회인 만큼 양쪽은 징병 체제나, 군 생활의 억압성도 장난이 아니다. 징병을 부담스러워하며 가능만 하면 피하고 싶어 하는 양쪽 젊은이들의 심정 역시 충분히 비교할 수 있다. 또한, 교육을 통해 최근까지 ‘자수성가’, 즉 신분상승이 가능했던 후발 발전 사회인 만큼 양쪽의 교육열도 출중하다. 한국에서도 러시아에서도 예컨대 노르웨이 같은 나라보다는 학생들이 훨씬 더 많은 숙제를 해야 하고, 훨씬 더 어려운 수학을 풀어야 하며, 훨씬 더 많은 독서를 한다. 어느 측면을 봐도 흡사한 부분이 매우 많은데, 그것이 예컨대 한국 영화가 러시아에서 최근에 붐을 일으킨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 영화들 속에는 러시아의 역사나 현실이 거울처럼 그대로 담겨 있다. 예를 들어 <남영동 1985> 같은 영화를 보는 러시아 관객은, 오늘날 러시아 재야인사들이 겪는 일을 떠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양쪽이 공유하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불행하게도 바로 ‘세계 최악’에 가까운 자살률이다. 매일 평균 약 38명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한국의 자살률은 10만명당 26명 정도다. 부자나라 클럽이라고 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는 단연 최악이다. 한국과 달리 러시아는 오이시디에 가입하지도 않았고 가입할 전망도 보이지 않는다. 한데 신뢰하기 어려운 러시아 국내 통계가 아닌 세계보건기구의 통계를 살피면, 러시아의 자살률 역시 25명 정도로 한국과 엇비슷한 수준이다. 양쪽의 자살률은 세계 평균인 9명에 견줘 2.5배 정도 높다. 즉, 양쪽은 “자살 공화국”의 오명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

한데 두 나라의 자살률 추이 곡선을 보면 유의미한 차이가 바로 눈에 띈다. 러시아의 자살률은 1990년대 초중반에 최악(40명 이상)이 되었다가 그 뒤로는 꾸준히 내려가고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2011년에 최악(31명)에 도달한 뒤 최근 5~6년 동안 25~26명 수준에서 고착된 모습을 보인다.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두 나라가 ‘자살 공화국’이 된 원인을 세밀히 봐야 한다. 러시아 같은 경우에는, 소련의 몰락(1991년) 당시 10만명당 20명 안팎이었던 자살률이 그 3~4년 뒤에는 거의 2배로 껑충 뛰었다. 공동 이념의 상실, 탈산업화와 빈곤화 속에서 알코올 중독률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올랐고 자살이 과거보다 훨씬 빈번해졌다.

반면, 2000년대 초반부터 경제 사정이 나아지고 사회가 안정화되자 알코올 중독률이 계속 줄었고, 자살률도 대체로 하향곡선을 그렸다. 러시아에서 자살률은 정확히 빈곤율, 그리고 알코올 중독률과 정비례한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알코올 소비가 많은 일부 오지 농경 지역의 자살률은 40~50명에 이르지만,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이 선호되는 모스크바는 4명 정도로 세계적으로 보아도 낮은 편이다.

물론 생활고나 취업 실패에 시달리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는 한국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스스로 밝히는 사람의 3분의 1 정도는 그 이유로 경제적 어려움을 거론하니 분명히 한국에서도 빈곤과 자살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소련의 몰락 이후 돌연히 생활 수준이 평균 2배 이상 떨어지고 빈곤율이 35%에 달하며 절망의 도가니를 방불케 했던 1990년대의 러시아와 달리, 한국은 대체로 꾸준히 경제 성장을 해왔다. 한국의 빈곤층이나 중하층이라 해도 비록 소폭이긴 하지만 절대 소비액은 장기적으로 조금씩 늘어갔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1980년대에도 빈곤층의 경제적 고통은 매우 심각했다. 그러나 그때 자살률은 10만명당 7~8명에 불과했다. 부유해지고, 심지어 ‘선진국’ 타이틀까지 따낸 대한민국에서 최근 20여년간 자살이 유행병처럼 번지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한국적 자살 현상의 배경에는 양극화 속의 빈곤, 극심한 노인 빈곤, 노동 시장의 이원화와 불안 노동의 증가, 그리고 노동 시장 진입 실패자의 증가 등이 있지만, 보통 개개인의 경우에 중요한 원인으로 떠오르는 것은 무엇보다 타자, 사회와의 ‘관계’이다.

대체로 인간에게 온갖 고통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갈 힘을 주는 심적 요소는 바로 타자의 관심과 존중, 그리고 소속감이다. 아무리 가난해도, ‘나’를 걱정해주고 나의 존엄성을 인정해주는 가족이나 친구, 나에게 존재감을 부여해주는 어떤 집단에 대한 소속감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극단적 선택을 피하고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세가지 요소의 결핍은, 부유하고 ‘선진적’인 오늘날 대한민국을 심리적인 ‘사막’으로, 개개인이 대체로 불행하고 우울한 사회로 만들었다.

남에게 관심을 보여주고 누군가를 챙기자면 우선 여유부터 필요하다. 물리적인 시간적 여유와 심적 여유이다. 그러나 ‘선진국’ 대한민국에는 돈에 여유 있는 사람들마저도 보통 시간적 여유나 심적 여유는 없다. ‘빨리빨리’가 이 사회에서 공기처럼 되다 보니 바쁘지 않으면 아예 당장 불안감을 느낄 정도이다. 비정규직 노동자 같으면 고용불안 때문에 늘 심적으로 힘들지만, 공무원이나 대기업 정규직들도 높은 실적 요구에 시달려 대개 여유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모든 사회 조직이 서열화되어 있어, 하급자나 사회적 ‘급’이 없는 무직자를 하대하지 않고 그 존엄성을 훼손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소수이다. 그리고 과거와 같은 ‘가족’은 와해되어 1인 가구의 비율이 40%에 육박하고, 평균 근속 기간이 6년밖에 안 되어 ‘직장 공동체’가 이미 무너진 사회에서 소속감을 느끼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의, 부유하지만 너무 불행한 자살 공화국 대한민국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서로를 아껴주고 존중해주고 각자에게 소속감을 키워주는 ‘따뜻한 사회’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러자면 우선 신자유주의적 과로 강요와 불안 노동 양산을 중지해야 하며 일터가 민주화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불행한 선진국’이라는 절망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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