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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칼럼

[숨&결] 쓰레기와 이야기

등록 :2021-09-01 11:49수정 :2021-09-02 02:38

이길보라|영화감독·작가

일본 규슈 지역에 내렸던 큰비로 바닷속이 헤집어졌다. 온갖 쓰레기가 밀려왔다.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동네 주민들이 하나둘씩 나와 청소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페트병, 캔 등의 쓰레기가 해안가에 가득했다. 멋진 바다 경치가 아닌,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풍경이었다. 종량제 봉투를 들고나왔다. 잘게 부스러진 스티로폼 같은 미세 플라스틱은 주울 수 없었지만 신발, 야구공, 페트병, 캔, 성인용품 등의 쓰레기를 엄청 주웠다. 사랑하는 바다와 내가 사는 동네를 이대로 두고 싶지 않았다. 물론 주워 담을 수 없는 미세 플라스틱을 마주할 때면 인류는 곧 멸망할 거라는 비관론에 휩싸였지만 말이다.

갑자기 한 할아버지가 소리를 질렀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일본어를 못한다고 손을 저으니 같은 말을 반복했다. 고개를 갸우뚱하자 그가 말했다.

“하지 말라고!”

그 말은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창고 앞에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거였다. 그의 창고 앞에는 바닷가에 놀러 온 이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가 종종 놓여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그는 내가 쓰레기를 버리려는 줄 알고 소리를 질렀고, 나는 지구를 구하는 마음으로 자원봉사를 했는데 난데없이 꾸중을 들어 황당했다. 그러나 상황을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영어로 소리쳤다.

“여기다 버리려던 거 아니고 저쪽 우리 집 앞에 버릴 거거든요!”

함께 쓰레기를 줍던 자원봉사자가 씁쓸하다며 위로했지만 당황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하루 종일 분했다. 칭찬 들으려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가 화를 낼 일은 아니었다. 내가 일본어를 못해서 더 화를 낸 건 아닌지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무단 투기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그의 처지를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그러나 속상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이주한 이후 처음 겪는 기분 나쁜 일이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억울한 일이 되어 괴로웠다. 종일 씩씩대다가 분해하다가 슬퍼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창고 앞으로 갔다. 답답한 마음에 무어라 말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그가 나왔다. 심장이 쿵쾅댔다. 말해야 했다. 일본어도 잘 못하면서 대뜸 그를 불러 세웠다. 할아버지는 영어 못한다고 손사래를 쳤다. 나는 표정, 손동작, 약간의 일본어와 영어를 합쳐 말했다.

“오늘 아침에! 오전 내내 여기 청소했는데! 할아버지가 저한테 화냈잖아요!”

상황 파악을 한 그는 뭔가를 들고 왔다. 쓰레기를 버릴 시 과태료를 부과한다는 내용의 경고문이었다. 더 화가 났다.

“제가 버린 게 아니고요. 저는 이 근처 살아서 쓰레기 그대로 들고 갔고요. 아침에 정황도 모르고 화내셨잖아요!”

말의 의미는 통하지 않았지만 화가 난 표정과 목소리 톤, 손짓은 만국 공용어였다.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빴다고 다시 한번 말했다. 그는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길 건너 집으로 들어갔다. 빨간 글씨로 명확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고문을 보며 할아버지도 정말 열받았겠네, 하루 종일 이거 사러 돌아다녔구나, 생각하며 마음을 누그러뜨리려 애썼다. 그가 무언가를 안고 나왔다. 수박이었다. 눈썹이 짙은 할아버지는 허리를 90도로 숙여 말했다.

“미안합니다!”

뭐죠, 이런 귀여운 결말이란? 얼떨결에 수박을 안았다. 헛웃음이 나왔다. 수박을 안고는 더 이상 화난 표정일 수 없었다. 핸드폰을 꺼내 번역기 앱을 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그랬느냐고 곧 청소차가 오니 쓰레기를 줍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나는 여기 산다고, 바다 많이 좋아한다고, 그래서 그런 거라고, 할아버지 마음도 이해하니까 경고문 어서 붙이라고 엄지를 척 내밀었다. 분하고 괴로운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싫어하는 이웃이 생긴 줄 알고 속상했는데 귀여운 이웃이 되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90도 인사도, 사과의 의미로 건넨 수박도 정말이지 영화 같았다. 쓰레기를 주우러 나갔다 이야기를 주웠다. 귀여움과 미담으로 재난의 시기를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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