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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16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이혼 소송 항소심 공판에 출석하는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 최태원 에스케이그룹 회장. 연합뉴스
지난 4월16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이혼 소송 항소심 공판에 출석하는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 최태원 에스케이그룹 회장. 연합뉴스

박은선 | 법률사무소 이유 변호사

돌 맞을 각오부터 해 본다. 전국 조강지처들의 손을 들어준 ‘사이다 판결’이었다고도 하지만, 고구마 몇 개 먹은 듯 답답하다. 판결에 뒤따라야 할 유의미한 논쟁이 없어서다. 최근 나온 최태원·노소영 간 이혼 사건 항소심 판결 얘기다.

언론 보도를 보면, 재판부는 최태원이 2013년 노소영에게 보낸 옥중편지와 2015년 세계일보에 보낸 공개편지, 2019년부터 김희영과 한 공식활동 등을 크게 문제 삼았다. 노소영과 법률혼 상태에서의 이 행위들은 ‘우리 헌법이 보호하는 혼인의 순결과 일부일처제를 무시한 태도’이므로 그 위법성이 상당하다고 했다. 결국 이례적인 위자료 20억원 판단의 핵심 논거는 ‘일부일처제 위배’였다. 하지만 재판부는 결과로 원인을 설명하는 우를 범했다. 최태원은 일부일처제를 무시해서 노소영과 결혼을 유지한 채 김희영을 만나는 불법행위를 범한 게 아니라, 이혼이 도무지 실현되질 않아 부득이 일부이처의 외관을 형성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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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들이 발생하기 이미 오래전에 최태원은 노소영에게 거듭 이혼을 요청했고, 둘은 장기간 별거 상태였다. 공개편지만으로도 확인되는 내용이고, 현 이혼소송도 최태원의 청구로 시작됐다. 결과만 놓고 보면 기혼자의 부정행위인 듯하나, 그 원인이 ‘이혼을 원함에도 제도상 할 수 없었음’에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즉 최태원이 일부일처제를 위배한 것이라면, 그 책임은 ‘유책 배우자는 상대 배우자의 반대 시 이혼할 권리가 없’는 현행 민법 규정에 있기도 하다. 바로 이 점에서,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유책주의와 파탄주의에 대한 공론장이다.

우리나라는 재판상 이혼에 있어 귀책이 있는 쪽에는 이혼청구권을 인정하지 않는 유책주의를 따른다. 선진국들이,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와 무관하게 한쪽이라도 원하면 이혼이 성립하는 파탄주의를 따르는 것과 대조적이다.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유책주의를 따르는 것은 우리나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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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상 배우자, 제3자 모두와 관계를 유지하려다가 발각된 이가 부정행위의 불법행위 책임을 부담해야 하는 것은 마땅하다. 하지만 최태원은 속된 말로 ‘두 집 살림’을 한 게 아니다. 현행법에 가로막혀 달리 도리가 없었을 뿐이다. 관점을 달리하면 그는 오히려 김희영과의 일부일처제를 준수했다. 그럼에도 이런 법상의 문제, 사실관계들을 깡그리 무시한 채 일부일처제를 운운하며 이례적인 손해배상액을 산정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다만 최태원의 편지들과 김희영과의 동행 등을 ‘일부일처제 무시’가 아닌 ‘불가항력적 행위’로 평가하려면, 법원이 관련 민법 조항을 (예외적으로라도) 파탄주의를 허용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는 헌법재판소가, 해당 민법 조항을 유책 배우자의 이혼청구권을 전면 불허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한 그 조항이 이혼의 자유, 인격권 등을 침해하여 헌법에 반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필요하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2015년 대법원에서는 “혼인관계가 파탄되었음에도 유책 배우자가 이혼을 청구하고 상대방이 이를 거부한다는 사정만으로 일률적으로 이혼 청구를 배척하는 것은 더 이상 이혼을 둘러싼 갈등 해소에 적절하고 합리적인 해결 방안이라고 보기 어렵다”라는 파탄주의 허용 취지의 소수의견(6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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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좋으라고 이혼해줘.” “사랑을 택한 대신 평생 불륜 딱지 달고 살게 해주겠어.” 다친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오로지 복수와 괴롭힘을 위해, 껍데기만 남은 결혼을 억지로 유지하며 상대방을 본의 아닌 부정행위자로 만드는 것이 과연 결혼제도의 정의일까. 법과 제도가 심장을 강제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어쩌면 현 유책주의는 내밀한 사적 영역에 국가권력을 과도하게 개입시키는 실질상 이혼 금지 제도로서, 간통죄나 호주 제도와 같은 구시대적 유물에 불과할지 모른다.

지금 필요한 것은 ‘손쉬운 손가락질’이 아닌 ‘유책주의와 파탄주의에 대한 진지한 공론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