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으로 의료대란이 가시화하면서 정부가 군 병원 12곳의 응급실을 민간인에게 개방한 20일 오후 경북 포항에 있는 해군포항병원 응급실에서 의료진이 민간인 환자가 올 것에 대비해 장비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으로 의료대란이 가시화하면서 정부가 군 병원 12곳의 응급실을 민간인에게 개방한 20일 오후 경북 포항에 있는 해군포항병원 응급실에서 의료진이 민간인 환자가 올 것에 대비해 장비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왜냐면] 이경민 | 동국대일산병원 응급의학과 임상조교수

지난 20일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은 전날 브리핑에서 실수가 있었던 부분에 대해 사과하며 “일주일 동안 잠을 못 자고 피곤해서 그랬다”고 했다. 그가 응급의학과 의사였다면, 고소당한 뒤 실형이 예상된다. 입시전쟁부터 시작해 의대를 거쳐 전공의, 전임의, 주니어 교수가 되기까지 수년을 피곤하게 일한 사람들이 ‘실수하지 않아도’ 비일비재하게 고소당하고 일부는 실형을 선고받는데, 겨우 일주일 피곤하게 일했다고 실수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말 한마디에 우리나라 보건의료정책 기조가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분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의대 증원 규모도 피곤한 상태에서 ‘0’ 하나를 더 쓴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나는 이 나라의 응급의학과 의사다. 의사들 사이에는 ‘바이털(바이탈, 생명과 직결된 필수의료) 뽕’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꺼져가는 생명을 살리면서 느끼는 아드레날린에 취해 ‘필수과’를 선택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입시전쟁이 끝난 뒤 대학의 로망은커녕 매주 토요일마다 엄청난 범위의 시험을 치러야 했고, 방학은 고등학교보다 짧았다. 최종적으로 국시까지 거쳐 의사 면허증을 손에 쥐었을 때, 그때 내 삶을 갉아먹는 이 길에서 떠났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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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치 앞을 예측하지 못하고 그저 기대에 부풀어 의업에 발을 들였다. 전공의법(주 80시간 수련 초과 금지, 인턴·레지던트 적용)도 시행하기 전이라 10일 동안 당직실에서 손빨래를 해가며 240시간을 근무했다. 거기에 12시간 정규 근무까지 연속 252시간을 근무한 뒤 퇴근하면서 ‘인턴만 끝나면 이 길에서 떠나겠다’고 다짐했다. 그때가 떠날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결국 환자와 마주한 의사는 이 길에서 쉽게 떠날 수 없다. 심지어 나는 ‘바이털 뽕’에 취해 응급의학과를 선택했다. 하지만 “내 목숨 희생해 환자 목숨 살린다”는 사명감 넘치는 농담을 하던 응급의학과 의사는 이제 없다. 원인 분석 없이 개인의 희생만 강요하는 국가와 사회 덕분에 드디어 ‘바이털 뽕’에서 깨어났다.

사명감은 희생을 수반하는데 모두가 그것을 당연히 여길 때, 사명감의 대부분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린다. 생명을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24시간 365일 개인이 아닌 ‘의사’로 살아야 한다면 이 정도의 희생을 감내할 보상이 필요하다. 아주 쉽게 돈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회적인 인정과 존경이 될 수도 있고, 국가에서 지원하는 훌륭한 시스템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필수과 의사’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국가는 선거권을 가진 국민에게 건강보험료를 올리자고 할 수가 없어서, 병원은 인건비를 절감해서라도 수익을 내야 해서 손을 놓아버렸다. 그런데 국민은 ‘필수과 의사’의 열악한 근무 환경에는 관심도 없고, 그저 생명과 관련한 일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이 시베리아 벌판이라도 꼼짝 말고 그 자리를 지키기를 바란다. 심지어 내 가족조차 “환자의 생명을 담보로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아무에게도 응급의학과 의사의 꺼져가는 삶과 사명감은 보이지 않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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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동안 필수과는 심각한 인력난을 겪고 있다. 다른 직군과 비교해 삶의 질 측면에서도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려왔다. 주 4일제가 논의되는 마당에 36시간씩 연속으로 근무하고 있자면 언제든 사직서를 품고 다니게 된다. 응급실 앞 편의점에도 24시간 365일을 운영하기 위한 최소 인력이 있다. 지하철 안전문 관련 작업은 최소 2명이 함께해야만 참혹한 희생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직업이든 업무량과 위험도에 따라 최소 인원이 있어야 근로자의 안전이 보장되고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도 그 품질을 믿을 수 있다.

하지만 안전이 가장 중요한 병원에서는 1명의 의협심과 사명감으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하려 한다. 그리고 의협심과 사명감을 드러낸 사람은 위험을 부담한 대가로 적자로 인한 실적 압박을 받고, 고소와 실형의 위험에 가장 먼저 노출된다. 특히, 대학병원 교수는 진료뿐만 아니라 의대생과 전공의를 교육하고, 연구에도 적극 참여해야 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대학병원이 24시간 불을 밝히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젊음이 희생되어 왔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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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잠든 시간에도 국민의 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해 병원이 환하게 불을 밝히기를 원한다면, 근로자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병원을 24시간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의료진의 최소 인원을 평균 내원 환자에 따라 알맞게 추계해 법적인 안전망을 구축하고 의료진 1명 당 환자 수를 제한해야 한다. 평범한 사람은 떠날 수밖에 없는 곳, 특별한 1%만 남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누구든 필수과를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의사가 부족해서 인력난에 시달린다고 생각하는 ‘필수과 의사’는 없다. 의사가 부족해서 사직률이 증가하고 동료들이 필수 의료를 떠난다고 생각하는 ‘필수과 의사’도 없다. 의사 수가 늘어나면 ‘바이털 뽕’이 다시 성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필수과 의사’도 없다. 통증이 매우 심한 환자에게는 마약성 진통제가 마약과 같은 중독 작용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필수과 의사의 비참한 삶’은 무한한 희생과 고통으로 점철되어 ‘바이털 뽕’으로도 중독시킬 수 없다. 2천명이 생기든 2만명이 생기든 이런 고통 속에서 ‘바이털 뽕’에 취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필수과는 더 이상 매력적인 직업이 아니다.

바이털이라는 마약에 취해 내가 밤을 지새우면서 ‘새벽 3시의 피곤함이 환자에게는 평생의 고마운 기억이겠지’하며 선의와 사명감으로 살아가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근무하다 말고 눈물을 삼켰다. 내가 세상에 보내던 선의와 사명감을 당연하다 못해 당당하게 요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나는 점점 ‘바이털 뽕’에서 깨어나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이 자리를 지키지 못하게 될 것 같아 두렵다.

하지만 국가가 문제의 본질을 흐리지 않고 근로자의 안전과 서비스의 품질을 함께 보장할 수 있는 훌륭한 시스템을 갖추면 ‘바이털 뽕’은 언제든 다시 성행할 수 있다. ‘바이털 뽕’의 유행은 의사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면 나는 후배들과 미래의 응급의학과 전공의들에게 “라떼(나 때)는 말이야, 내 목숨 희생해서 환자 목숨 살렸어”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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