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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일본

“내 위안부 기사 날조 아니다…우익 협박에 굴복 안할것”

등록 :2014-12-21 20:00수정 :2014-12-21 22:41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가 16일 일본 삿포로 시내의 한 사무실에서 자신의 소식을 전하고 있는 일본 신문을 살펴보며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우에무라는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공개적으로 밝힌 김학순 할머니의 사연을 보도한 인물이다. 이번 인터뷰에서 그가 강조한 점은 “나는 날조 기자가 아니다”는 것이었다.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가 16일 일본 삿포로 시내의 한 사무실에서 자신의 소식을 전하고 있는 일본 신문을 살펴보며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우에무라는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공개적으로 밝힌 김학순 할머니의 사연을 보도한 인물이다. 이번 인터뷰에서 그가 강조한 점은 “나는 날조 기자가 아니다”는 것이었다.
23년 전 ‘위안부’ 첫 보도한 우에무라 전 기자 심층인터뷰
“난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왜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16일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 시내의 한 사무실에서 마주앉은 우에무라 다카시(56) 전 <아사히신문> 기자는 머리를 감싸 쥐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침묵을 지키며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밖에 별다른 위로의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고 있는 일본 사회에서 우에무라 기자는 매우 독특한 위치에 서 있다. 그는 1991년 8월11일 <아사히신문> 본사판에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처음 공개적으로 밝힌 김학순(1924~1997) 할머니에 대한 첫 기사를 쓴 인물이다. 일본 우익에게 그는 위안부에 대한 ‘날조 기사’를 써 일본의 명예와 국익에 헤아릴 수 없이 큰 상처를 남긴 ‘매국노’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나은 일본과 평화로운 동아시아를 만드는 첫걸음이라고 믿는 진보 세력들엔 무너져선 안 될 중요한 ‘보루’가 되어 있다. <한겨레>는 16~17일 이틀에 걸친 우에무라와의 심층 인터뷰를 통해 아베 정권의 고노 담화(1993년) 검증이 진행된 지난 1년 동안 일본 우익들의 도를 넘은 공격을 속수무책으로 받아내야 했던 그의 고통의 시간을 뒤돌아봤다. 그 속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사회의 뒤틀린 자화상이었다.

한국인 아내와 결혼했고

장모가 태평양전쟁유족회장

우익들은 허위 선전전을 벌인다

장모를 위해 기사 날조했다고…

딸에 대한 공격이 변화의 계기

사람들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학자·변호사·언론인 444명이 지지

위협받던 강사직 계약 1년 연장돼

흘러내린 가슴, 불룩한 배, 튀어나온 배꼽.

-당신은 23년 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처음 보도했다. 그로 인해 지난 1년간 어떤 일들을 겪었나?

“공격의 시작은 지난 1월 말 발매된 시사주간지 <주간문춘>(발행일 기준으론 2월6일호)이었다. 기사의 제목은 ‘위안부 날조 아사히신문 기자가 아가씨들이 다니는 여자대학의 교수로’였다. 위안부 기사를 ‘날조한’ 우에무라가 4월부터 고베쇼인여자대학 교수가 된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뒤인 1월31일 학교의 사무국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2월5일 고베의 한 호텔에서 부학장(부총장), 사무국장과 면담을 했다. 난 기사를 날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설명하면 학교에서도 이해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설명 자료를 건네줬더니, 대학에선 ‘기사의 진위는 상관없다. 이대로라면 학생 모집에 영향이 있고, 학교의 이미지가 나빠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정말 기사를 날조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지 않으니 매우 유감스러웠다. 그렇게 3월7일 고용 계약이 취소됐다. 처음엔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우에무라 기자에 대한 일본 우익들의 도를 넘은 공격이 시작되던 무렵, <산케이신문>을 필두로 한 일본 언론들은 한-일 외교 현안이 된 위안부 문제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끌어가기 위해 위안부 동원 과정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2월20일 고노 담화 검증팀을 설치하겠다는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검증팀은 6월20일 고노 담화의 정당성에 흠집을 내는 보고서를 내놓는다. 아베 정권이 고노 담화를 흔들자, 우익들은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찾아 나섰다. 아베 정권이 고노 담화 검증에 나서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구실을 했던 야마다 히로시 당시 차세대당 중의원 의원은 우에무라 기자를 국회에 증인으로 소환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내놓았다. 우에무라를 비상근강사(시간강사)로 채용한 홋카이도의 호쿠세이대학까지 우익들의 공격 대상이 됐다.

-당신이 이렇게 엄청난 공격을 받게 된 원인은 뭐라고 보는가?

“지금의 상황은 나도 가끔 실감이 안 된다.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이 나왔을 무렵 나와 비슷한 기사를 쓴 사람이 많은데 왜 나만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아사히> 오사카 본사의 사회부 기자였던 1990년, 당시 데스크가 그해 여름의 평화기획으로 한국의 위안부 여성들을 발굴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나는 그해 여름 2주 정도 한국을 돌며 취재했지만, 성공적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 뒤 서울지국장이 ‘위안부 여성을 찾아낸 것 같은데 취재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1991년 8월10일 서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사무실에서 윤정옥 공동대표를 통해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담긴 녹음 기록을 들을 수 있었다. 질문은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던 한국의 위안부 여성이 처음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섰기 때문에 충분히 기사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우익들은 위안부 문제가 지금처럼 세계적으로 큰 이슈가 된 것은 내가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보도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문제가 주목받게 된 것은 김학순 할머니가 그해 8월14일 직접 기자회견을 했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추정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다. 내가 한국인 아내와 결혼했고, 장모가 양순임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장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모가 전후보상 소송과 관련해 사기죄로 기소된 사건(지난 8월 무죄 확정)이 있었다. 우익들은 ‘우에무라가 장모를 위해 기사를 날조했다’는 허위의 프로파간다를 유포시키고 있다. 나는 1996~1999년 서울특파원 시절엔 ‘양순임의 사위가 위안부 기사를 쓴다’는 공격을 받기 싫어 일부러 그런 기사를 피하곤 했다.”

우에무라 기자에게 전해져온 일본 우익들의 협박 편지들. ‘매국노, 일본에서 꺼져라’ ‘한국으로 돌아가서 장모에게 빌붙어 먹어라’ 등의 욕설이 적혀 있다. 그의 딸을 겨냥한 인터넷 댓글 가운데는 ‘자살할 때까지 압박을 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우에무라 기자에게 전해져온 일본 우익들의 협박 편지들. ‘매국노, 일본에서 꺼져라’ ‘한국으로 돌아가서 장모에게 빌붙어 먹어라’ 등의 욕설이 적혀 있다. 그의 딸을 겨냥한 인터넷 댓글 가운데는 ‘자살할 때까지 압박을 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애초 위안부나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은 뭔가?

“나는 1978년 와세다대학에 입학했고 1982년 아사히신문에 입사했다. 당시는 한국의 정치 정세가 급변하던 시절이었다. 1979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숨졌고, 1980년 광주항쟁이 일어났다. 1981년엔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사형 판결이 있었다.(직후 무기로 감형) 대학 시절 같은 기숙사에 재일 한국인 선배가 있었다. 그는 1970년대에 서울대 의과대학에 들어갔다가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에 연루될까 두려워 일본으로 돌아온 사람이었다. 그를 통해 한반도나 재일 조선인에 대한 차별 문제 등을 배우게 됐다. 1981년 한국을 여행했고, 대학생 시절 김대중 사형구형 반대 운동에도 참가했다. 이후 1987년부터 1년 동안 한국으로 어학연수를 가게 됐다. 한국이 오랜 독재정권 시대를 끝내고 민주화되던 시기였다. 1987년 대선 당시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김영삼, 김대중, 노태우 후보의 선거 유세에도 모두 참여했다. (1987년 10월) 서울 명동 와이엠시에이(YMCA) 강당에서 열린 <한겨레신문> 창간 발기인대회에도 가 송건호 선생(한겨레신문 초대 사장)과도 만났다. 이후 1989년 1월 오사카 사회부에 근무하면서 재일 한국·조선인 문제를 담당했다. 1997년 12월 서울특파원 시절 <아사히>에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 기사를 쓴 것도 나다.”

-우익들은 당신을 ‘날조 기자’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날조 기사를 쓰지 않았다. 나에 대한 비판은 김학순 할머니에 대한 기사에서 ‘여자정신대’와 ‘종군위안부’를 혼동되게 썼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로 끌려가기 전에 기생 학교에 다녔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듯 위안부 문제가 처음 불거졌을 때 한국도 일본도 위안부와 정신대를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또 기생 학교는 술자리에서 춤을 추거나 악기를 다루는 방법을 배우는 곳으로 거기에 들어간다고 반드시 위안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를 비판하고 있는 <요미우리신문>의 당시 기사를 봐도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용하거나 김학순 할머니가 기생 학교에 들어간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 기사들이 있다. 김학순 할머니가 ‘강제연행’됐다고 쓰지도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조선에선 위안부의 강제연행이 없었고, 적어도 지금까진 이와 관련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김학순 할머니도 일관되게 말하는 것은 강제연행이 아니라 ‘속아서 갔다’ ‘내 의사에 반해서 갔다’는 것이다. 나는 기사에 ‘여자정신대라는 명목으로 연행돼 일본군을 상대로 매춘행위를 강요당했다’고 썼다. 여기서 ‘연행’은 일본 우파들이 주장하듯 멀쩡한 사람을 사냥하듯 잡아갔다는 의미의 강제연행이 아니다. 나는 허위임이 드러난 요시다 세이지 증언(자신이 제주도에서 여성들을 사냥하듯 강제연행했다고 말한 증언)에 근거한 기사는 단 한 건도 쓰지 않았다.”

-당신이 우익들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당하던 무렵 <아사히>는 위안부 기사들에 대한 검증 기사를 발표했다.

“8월5일 <아사히>가 위안부 기사를 검증하면서 내가 쓴 기사는 ‘날조가 아니다’라고 확인했다. 나는 그것으로 내 명예가 회복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공격은 더 심해졌다. 가장 크게 당황하고 고독감을 느낀 게 그 무렵이었다. 변화의 계기가 된 것은 딸에 대한 우익들의 공격이었다. 어린 여학생에 대한 도를 넘은 공격에 사람들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교류해온 전직 고등학교 교사인 신자이 다카시(85) 등 후원자들이 나타나 지원 모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 시민은 페이스북을 통해 ‘호쿠세이대학을 응원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것이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바꾸는 데 큰 구실을 했다. 이어 9월30일엔 오사카 데즈카야마학원대학에 재직하던 <아사히> 출신 문학부 교수(67)가 협박 편지에 굴복해 사직한 일이 <마이니치신문>에 보도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내 문제를 다루지 않던 언론들이 호쿠세이대학에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10월6일 전국의 학자, 변호사, 언론인 444명이 모여 ‘지지 마라 호쿠세이의 모임’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난 17일 호쿠세이대학이 비상근강사 계약을 1년 연장하기로 발표했다.”

-신문사를 그만둔 뒤 생활은 어떤가?

“<아사히>의 정년은 60살이지만, (연봉피크제를) 선택할 경우 정년이 늘어나 65살까지 다닐 수 있다. 나는 고베의 여대 교수직에 합격한 상태였기 때문에 55살에 퇴직을 했다. 현재 수입은 호쿠세이대학에서 나오는 약간의 비상근강사의 강사료 뿐이다. 50살 때 와세다대학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저술 활동을 하는 게 꿈이었다. 일본엔 교수가 되고 싶어하는 기자들이 많기 때문에 교수 공모의 경쟁률이 굉장히 높다. 몇번이나 면접까지 올라갔지만 대부분 위안부 관련 보도가 문제가 돼 중도에 탈락했다. 그러다 겨우 합격한 곳이 고베의 여대였다. 난 테헤란·서울·베이징에서 특파원 생활을 했고, 책도 여러 권 냈다. 그러나 박사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받는다 해도 대학에 취직되긴 힘들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두려움이 몰려온다.”

-최근 일본의 모습에서 무엇을 느꼈나?

“나는 일본을 사랑하는 애국자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존경받는 국가가 되길 바란다. 그러려면 우리가 주변국들에 사과할 게 있으면 사과하고 고칠 게 있으면 고쳐야 한다. 과거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으면 아시아 안에서 일본이 존경받고 신뢰를 얻을 수 없다. 현재의 일본은 일그러져 있다. 내가 김학순 할머니의 기사를 쓴 것은 32살 때였다. 당시 ‘태평양전쟁이 끝난 지 50년 만에 겨우 역사의 어두운 부분에 빛이 비치려 하고 있다. 이를 방치하는 것은 할머니들을 돕지 않고 외면하는 것’이라고 썼다. 이건 젊은 우에무라가 56살이 된 지금의 우에무라에게 던지는 말이기도 하다. 그동안 위안부 문제를 애써 피해왔지만 이젠 이 문제에 대해 눈을 돌리지 않고 직시할 것이다. 공격을 당해 도망갈 데가 없으니 싸울 수밖에 없다. 지금 일본엔 역사의 어둠을 직시하려는 사람들을 공격하려는 세력들이 있다. 그렇지만 이에 굴하지 않는 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다. 내년에도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된 게 무엇보다 기쁘다. 나는 날조 기사를 쓰지 않았다. 앞으로도 부당한 공격에 굴하지 않고 싸워갈 생각이다.”

삿포로/글·사진 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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