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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 한반도 정세는 그야말로 요동쳤다. 집권 첫해인 2017년엔 일촉즉발의 정세 속에 ‘전쟁 위기설’이 들끓었고, 2018년엔 남북 정상회담에 이은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 성사로 ‘냉전 해체’와 ‘평화 체제’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키웠다. 하지만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다시 만난 북-미 정상은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 채 회담을 마쳤다. 이후 남북-북미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기에 접어들었고, 최근 ‘전쟁 위기설’이 재등장하는 상황까지 내몰렸다. ‘트럼프 집권 2기’가 현실화하면, 한반도 정세는 또 어떻게 달라질까?
“조 바이든 행정부의 ‘안정적인 협상 부재’에 지친 분들은 트럼프 행정부 시절의 예측 불확실성이 역동적으로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기대하는 모양이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외교·안보는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게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하다. 불확실성이 커진다는 것 자체가 안보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인제대 교수)은 <한겨레21>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이어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질서가 기존과 전혀 달라졌다. 트럼프 행정부가 재등장해도 집권 1기 때와는 상황이 전혀 다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우발적 충돌을 막기 위한 세심한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인터뷰는 2024년 2월26일 오후 김 전 장관이 이사장을 맡고 있는 ‘한반도평화포럼’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회색지대에서의 북-러, 북-중 경협
—북한이 남쪽을 겨냥해 ‘적대적 두 국가론’까지 꺼내 들었다. 이제껏 볼 수 없던 상황이다.
“현재 남북 간 대화 채널은 모두 단절된 상태다. 남북관계가 크게 악화했던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도 민간 채널은 있었고, 당국 간 간접 대화도 이뤄졌다. 물밑 정보기관 사이 채널은 물론 민간·적십자·군사·정부 간 채널 등 모든 접촉 창구가 완전 불통된 것은 1972년 7·4 남북공동선언 발표 이후 처음이다. 여기에 북-미 등 국제적인 대화 창구도 막힌 채다. 북이 ‘적대적 두 국가론’을 내세운 것은 이런 정세를 반영한 것이다. 이제 군사분계선을 남북의 소분단선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대분단선으로 삼겠다는 뜻이다. 과거와는 질적으로 달라졌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도 급변하고 있는데.
“짧게 보면 미-중 협력 시대가 끝난 거고, 길게 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진 전후 질서를 뜻하는 ‘얄타 체제’가 종말을 고했다. 가자지구 전쟁 등 중동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특히 북한 문제에 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 간 합의 시스템이 파괴된 상태다. 북한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안보리에서 5개국이 합치된 결론에 이르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대북정책에 대한 국제적인 공동 대응·접근이 더는 작동하지 않게 된 것이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은 미-중 전략경쟁 격화 시점과 맞물린다. ‘하노이 노딜’만 없었어도, 미-중 전략경쟁 속에서도 한반도 문제가 최소한의 협력이 가능한 공간으로 남았을 것이다. 결국 북한은 외교·군사 분야뿐 아니라 경제 분야에서도 ‘북방’에서 생존을 추구하겠다고 돌아섰다.”
—북-러, 북-중 협력이 급격히 강화되고 있다.
“안보리 제재에는 불법과 합법의 경계에 있는 회색지대가 굉장히 크다. 이 부분에 대해선 각국이 유권해석을 할 수 있는 재량권이 있다. 러시아는 북한과 마찬가지로 제재를 받고 있는 터라, 회색지대를 적극적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안보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제재 이행에 대한 평가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2023년 9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방러 이후 급격히 밀착하는 북-러 사이의 경협은 이런 회색지대를 중심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북-중 무역과 달리 북-러 무역은 이른바 ‘비교우위’가 있다. 러시아 극동지역은 노동력을, 북은 에너지와 식량 등을 필요로 한다.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게 있으니 경협이 양쪽에 이익이 된다. 3월15~17일로 예정된 대선이 끝나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할 것으로 보인다. 양국 모두 제재 대상인 터라 제재에서 벗어나기 위한 협력도 있을 수 있다.
북-중 무역은 성격이 다르다. 중국은 미국을 대신해 ‘국제규범의 담지자’가 되려 한다. 가능하면 불법적인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중국도 ‘회색지대’를 적극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 북-중 무역은 기본적으로 상업적 토대보다 친척 방문이나 국경무역 형태가 주류다. 북-중 국경 자체가 일종의 ‘공동 국경’이기 때문에, 마음먹기에 따라 해상과 철도를 통한 공식 무역과 달리 통계에 잡히지 않는 형태로 이뤄질 여지가 크다.”
오바마·바이든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 그 후
—최근 북-중-러 3각 관계 속 ‘3개의 양자관계’를 눈여겨봐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냉전 시절 북-중-소(소련) 3각 관계 속에서 북한은 중-소 분쟁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강대국 틈에서 약소국이 강대국 간 갈등 상황에서 전략적 이익을 취한 독특한 사례였다.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 세계적 차원에서 미-러, 미-중 간 전략경쟁이 강화하는 터라 3개의 양자관계가 처음으로 선순환하고 있다. 한반도 주변 질서의 새로운 특징 중 하나다.
특히 군사 분야 협력이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한-미-일 3각 사이의 군사협력이 늘어나는 것만큼, 북-중-러 3각 간에도 상하이협력기구(SCO) 등을 통한 군사협력이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주변에서 중-러 간 공동 군사훈련이 확대되는 추세잖나. 북한이 이에 적극 편승하면서 군사협력의 규모나 빈도가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차기 공화당 대선 후보로 사실상 확정됐다.
“큰 틀에서 보면, 버락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와 바이든 정부의 ‘전략적 인내 시즌2’에 대한 실망감이 크다. 그러다보니 트럼프 정부가 다시 들어설 때 불러올 불확실성이 오히려 ‘안정적인 협상 부재’보다 유리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전혀 그렇지 않다. 외교·안보는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게 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불확실성이 커진다는 것 자체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 미국의 대북정책에서 중요한 것은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이다.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는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대북 강경정책을 취한 탓이 컸다. 달리 말해, 윤석열 정부의 대북 강경책 탓에 설령 트럼프 2기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크게 달라지기는 쉽지 않다.
하노이 회담이 왜 결렬됐는지 복기할 필요가 있다. 문제를 풀어갈 때 중요한 건 양쪽의 입장 조율이다. 이를 통해 신뢰가 쌓이고, 관계가 좋아져야 한다. 상향식-하향식 외교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다. 정상 간 깜짝 이벤트로 사진이야 찍을 수 있지만, 후속 실무 협상 없이는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윤 대통령의 외교는 트럼프 전 대통령을 닮아 있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게 하노이 회담처럼 될 수밖에 없다.”
미국 비용·부담 요구 높일 가능성
—‘트럼프 집권 2기’가 현실화하면, 1기 때처럼 북-미 간 ‘도박성 담판’이 벌어질까?
“외교란 건 ‘카드’가 많을수록 유리하니, ‘정치적 만남’은 가능할 수 있다. 국면에 따라 북-미 두 정상이 다시 악수할 수도 있겠지. 북은 최고지도자가 과도하게 권한을 행사하는 특유의 협상 방식이 있다. 북에선 ‘하노이 노딜’에 대한 책임을 세게 물었다. 북-미가 다시 만난다면, 북은 훨씬 강경하게 원칙적으로 협상에 임할 거다. ‘하노이의 기억’이 뇌리에 박힌 김 위원장도 뭔가 확실하게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선 협상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하노이 회담 당시 미국은 대북 협상을 두고 국내 정치적 이득을 우선 따졌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북의 핵시설 철거 같은 ‘스몰딜’보다는 ‘노딜’이 낫다고 판단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은 북이 핵무장 수준을 이전보다 엄청 높였고, 북-중-러 3각 체제가 외교·군사·경제 분야에서 원활하게 작동하고 있다. 미국의 대북 협상은 2019년보다 훨씬 어려워졌다.
한-미 간 대북정책 조율을 해야 하는데, 윤석열 정부의 기조가 있으니 이 역시 쉽지 않다. 그렇다고 빌 클린턴-김영삼 정부 때처럼 북-미는 풀리는데 남북관계는 안 풀리는 상황이 벌어지진 않을 것 같다. 결국 트럼프 2기는 대북 강경정책에 동조하면서 방위비 분담금이나 확장억제·전략자산 전개 비용 등과 관련한 요구 수위를 높일 가능성이 크다. 한미 연합군사훈련 비용도 마찬가지다.
덧붙여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적 사안에 대한 비용·부담을 나눠질 것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이를테면, 아프리카 소말리아 해역에 파견된 청해부대의 작전 범위를 호르무즈해협이나 홍해 등 분쟁지역으로 넓힐 것을 요구하면 어떨까? 청해부대 파병은 국회의 비준 동의를 받아 이뤄졌으니, 당장 국내 정치적으로 갈등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
경제적 측면 염두에 둬야
—한반도 위기론이 다시 횡행하고 있는데.
“북이 주장한 ‘적대적 두 국가 체제’가 안고 있는 문제의 본질은 ‘ 적대적’이란 표현이다. 이를 ‘평화적’으로 바꿔야 한다. 북은 스스로 핵보유국이라고 주장한다. 한-미 간엔 확장억제가 있다. 양쪽이 ‘ 핵억지’를 전제로 한 상황이란 뜻이다. 전면전이 벌어지면 다 죽는, 이른바 ‘ 상호확증파괴’(MAD) 상황이다.
군사적 긴장이 길어질수록 우발적 충돌 가능성도 커진다. 양쪽이 핵으로 맞선 상황에선 국지적 충돌이 벌어져도 양쪽 모두 전면전에 나서지 못한다. 재래식 분쟁이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인도-파키스탄 사례가 그렇다. 북한의 핵보유에 맞서 우리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주장의 가장 중요한 논리적 오류도 거기 있다. 핵무장이 되레 재래식·국지적 분쟁을 부추기는 환경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러니 우발적 충돌 가능성을 낮추는 게 가장 중요하다. 대북 강경론의 국내 정치적 효과만 생각할 게 아니라, 경제적 측면도 염두에 둬야 한다. 군사적 긴장이 장기화하고 협상 가능성이 낮아질수록 금융시장에 끼치는 영향이 커진다. 지난 30여 년 북핵 위기에도 ‘한반도 디스카운트’는 작동한 적이 없다. 긴장이 높아지면 외교적 노력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더구나 거시경제 지표가 좋지 않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정부가 깨닫기 바란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