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 AFP 연합뉴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 AFP 연합뉴스

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을 지낸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23일 지병인 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84.

올브라이트 가족은 이날 성명을 내어 “64대 미 국무장관이자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인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오늘 오전 숨졌다고 알리게 되어 가슴이 아프다”며 “사인은 암이었으며, 가족과 친구들이 그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고 밝혔다.

올브라이트는 빌 클린터 행정부 시절인 1997년부터 2001년까지 미 역사상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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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재임 중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확장을 적극 추진했다. 냉전시대 소련이 주도한 바르샤바조약기구 가맹국이었던 옛 공산권 국가 폴란드, 헝가리, 체코가 1999년 러시아의 그늘을 벗어나 나토에 신규 가입함으로써 서유럽에 편입했다. 이는 2000년대 발트 3국인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옛 동구권 공산국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의 나토 추가 가입으로 이어지는 기폭제였다. 지난달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지속적으로 반대해온 ‘나토의 동진’이다. 또한 블라디미르 푸틴이 2000년 러시아 대통령이 됐을 때 미국 고위 관료로서 그를 처음 만난 이도 올브라이트였다.

올브라이트는 지난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며칠 전 <뉴욕 타임스> 기고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공격을 감행한다면 “역시적 실수”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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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브라이트는 미 국무장관으로서 최초로 평양을 방문하는 등 북한 비핵화 문제에도 깊이 관여했다. 1999년 미국은 대북 포용 기조를 담은 포괄적 해결방안인 ‘페리 프로세스’를 발표하고 북한과 해빙 무드에 나섰다. 올브라이트는 2000년 7월 방콕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을 계기로 백남순 당시 북한 외무상과 회동해 북-미 고위급 교류에 물꼬를 텄다. 이어 같은 해 10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로 미국을 방문한 조명록 차수와 만나 △상호 적대 정책 배제 △상호 주권 존중 △무력 불사용 △내정 불간섭 등을 뼈대로 한 합의문을 발표했다. 올브라이트는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조율하기 위해 10월23~25일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과 회담했다. 그러나 11월 초 대선에서 공화당의 조지 부시 후보가 당선되면서 북-미 화해 분위기는 멈췄다.

1937년 체코의 수도 프라하의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난 올브라이트는 외교관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1948년 공산 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했다. 여성 명문 웰슬리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컬럼비아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 백악관 국가안보실 참모로 일하며 외교·안보 경력을 시작했다. 클린턴 행정부 1기(1993~1997) 때 유엔 주재 미국 대사를 맡은 뒤 2기 때 첫 여성 국무장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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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브라이트는 퇴임 뒤에도 국제 문제에 의견을 개진하며 활발하게 외교 정책에 관여해왔다. 숨지기 전까지 조지타운대 외교대학원 교수이자 국제정책 컨설팅 회사인 올브라이트 스톤브리지 그룹 회장을 맡고 있었다.

네드 프라이스 국무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그가 이 건물(국무부 청사)에 미친 영향은 매일 매일, 모든 복도에서 느껴진다”며 “물론 그는 첫번째 여성 국무장관으로서 선구자였고, 말 그대로 국무부 업무의 큰 요소들에 문을 열었다”고 말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과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나토 회의 참석차 유럽을 방문하는 길에 올브라이트 별세 소식을 접한 것으로 알려졌다.

황준범 기자 jayb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