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현지시각) 러시아 서부 벨고로트 지역의 한 스포츠 경기장에 셰베키노 마을 등에서 대피한 시민들을 위한 임시 거처가 마련돼 있다. AFP 연합뉴스
2일(현지시각) 러시아 서부 벨고로트 지역의 한 스포츠 경기장에 셰베키노 마을 등에서 대피한 시민들을 위한 임시 거처가 마련돼 있다. AFP 연합뉴스

“모든 것이 바뀌었어요. 24시간 만에 유령마을이 됐어요.”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댄 러시아 서남부 벨고로트주에 살고 있는 영어 교사 루슬란(27)은 최근 처음 뚜렷한 포격 소리를 들었다. 예전에 아주 먼 곳에서 퍼져오는 ‘쿵’ 하는 폭발음을 들은 적이 있지만 이번은 달랐다. 새벽 3시께 시작된 포격은 아침까지 계속됐다. 때론 집이 흔들리기도 했다. 그는 1일(현지시각) 집에서 나와 대피소에서 지내고 있다.

미국 <뉴욕 타임스>는 3일 지난달 말부터 러시아 국경도시를 향한 우크라이나의 공격이 거세지면서 인구 약 4만명이 살고 있는 러시아 서부 벨고로트주 셰베키노 마을이 사실상 “새로운 전선”이 됐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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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참상, 러시아서 되풀이되는 셈

최근 러시아 국경 마을을 겨냥한 드론·미사일 공격이 거세지면서 러시아 주민에게도 전쟁의 공포가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국경 너머에서 15개월 째 진행 중인 전쟁과 한발 떨어져 살아온 러시아인들도 ‘난민’ 신세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국경에서 10㎞ 떨어진 셰베키노 마을 등을 겨냥한 공격이 이어지자 주 당국은 주민 2500명을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체육관으로 대피시켰다. 일부 주민들은 자가용 등을 이용해 자발적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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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다리야(37)는 셰베키노 마을이 “멋지고 꽃이 많은, 이웃과 행복하게 지내는 이들로 가득”한 곳이었다면서 “지금은 오전 고통과 죽음, 비참한 삶만 남았다”고 말했다. 마을엔 이제 전기도, 대중교통도 상점이나 주민도 없다. 드론과 미사일 공격으로 지하 방공 대피소로 몸을 피하는 일이 잦아져 일상 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워졌다. 이 지역에서 사업을 하는 올레그는 “우리는 지금 전환점을 마주하고 있다”면서 “애초 전쟁에 반대하는 이들은 소수”였으나 지난 나흘 동안 포격이 이어지자 “사람들이 마음을 바꾸기 시작했다”라고 했다.

<뉴욕 타임스>는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영상과 목격자 증언을 통해 최근 반러 민병단체 두 곳의 공격으로 러시아 국경 지역의 민간인 마을이 광범위하게 파괴됐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시민들은 피해 주민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거나 성금을 모아 거처를 제공하고 있다. 지난해 2월 말 러시아의 침공 뒤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벌어진 일이러시아 땅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는 셈이다. 이 매체는 이 같은 변화가 “러시아 정치에 아직은 예측하기 어려운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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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정부, 국경 주민 운명엔 큰 관심 없어

주민들은 러시아 정부가 국경 지역 주민들의 운명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자 더 많은 이들에게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셰베키노는러시아다”(#ShebekinoIsRussia) 해시태그 운동을 벌이기도 한다. 러시아 당국이 크렘린(5월3일)이나 모스크바(5월30일)에 드론이 날아든 소식을 대대적으로 전하는 것과 달리 국경 지역의 피해는 제대로 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 상황과 관련해 국영 언론이 전하는 보도 이상의 정보를 찾아보는 러시아인들은 4명 가운데 1명에 불과한 수준이다.

3일 미국 <시엔엔>(CNN) 방송도 러시아 국경을 겨냥한 잇단 공격에 대해 러시아 내부를 불안정하게 만들려는 우크라이나 의도가 효과를 보고 있다는 분석을 제시했다. 우크라이나는 이번 공격을 공식 인정하지 않는 등 모호성을 유지하면서 자국 국방 조직 아래 속해 있는 러시아 시민들로 이뤄진 ‘러시아자원병부대’(Russian Volunteer Corps)와 ‘러시아해방부대’(the Freedom for Russia Legion) 등 민병 단체를 활용해 러시아 내부의 혼란과 불안을 일으키고 있다. <시엔엔>은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했을 때도 비슷한 수법을 썼다고 짚었다.

뱌체슬라프 글라드코프 벨고로트주 지사는 지난달 31일 우크라이나가 지역 내 마을 두 곳을 포격했고, 1일 새벽에는 셰베키노 지역 인근에서 세 차례 공격이 추가로 발생했지만,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전투원 50명 이상을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2일엔 차를 타고 가던 여성 2명이 포격으로 발생한 파편에 맞아 숨졌고, 3일에도 여성 2명이 포격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습을 연일 이어가며 인명 피해를 내고 있다. 4일 민간인 주거지를 향한 러시아의 공습으로 중부 드니프로 지역에서 2살 여자 아이가 숨지고 22명이 다쳤다. 우크라이나의 어린이날이었던 1일엔 키이우 등에서 어린이를 포함한 3명이 숨지고 11명이 다쳤다.

베를린/노지원 특파원 zo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