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현지시각) 독일 카셀대가 대학 안에 설치됐던 평화의 소녀상을 기습 철거한 뒤 재독 시민사회단체 코리아협의회가 올린 청원 글. 청원 누리집 화면 갈무리
지난 9일(현지시각) 독일 카셀대가 대학 안에 설치됐던 평화의 소녀상을 기습 철거한 뒤 재독 시민사회단체 코리아협의회가 올린 청원 글. 청원 누리집 화면 갈무리

독일 중부 헤센주에 자리한 카셀 주립대가 9일 총학생회 주도로 대학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을 기습 철거하자 현지 시민단체가 ‘원상 복구’를 요구하는 등 강력 대응 방침을 밝혔다. 한국 정부가 강제동원 배상 판결 등 민감한 한-일 간 ‘역사 현안’에 6일 일방적인 양보안을 발표하는 등 미온적 태도를 보이자, 일본 정부의 지속적 철거 압박을 받아온 대학이 전격 철거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독일 베를린 코리아협의회는 11일 이틀 전 이뤄진 소녀상 철거 사태와 관련해 긴급 성명을 내어 “세계 여성의 날(8일) 바로 다음날 새벽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반파시즘 정신을 기린다는 카셀대 총장단이 평화의 소녀상을 코리아협의회와 총학생회에 아무런 통보도 없이 기습 철거했다”고 규탄했다. 이들은 카셀대가 “학생의회의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의결된 소녀상 영구 존치 결정을 무시했다”며 △소녀상을 원래 자리에 다시 설치할 것 △여성 성폭력 문제를 일깨우려는 학생들의 의지를 존중할 것을 요구했다. 또 이번 사태의 배후에 있는 일본 정부엔 “제3국에서의 소녀상 철거를 종용하지 말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카셀대 총학생회는 앞선 9일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 “우리도 모르게 평화의 소녀상이 이른 아침 대학에서 철거됐다”고 밝혔다. 대학 당국 역시 같은 날 공식 누리집에 “2022년 카셀대 총학생회가 학생회관 앞에 세운 평화의 소녀상에 대한 대학의 허가가 한시적으로 체결됐고 이미 몇달 연장됐으나 만료됐다”며 소유주인 코리아협의회가 소녀상을 찾아갈 때까지 학교가 이를 보관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학은 예술품을 영구 전시하려면 해당 프로젝트가 교육·학술연구와 지속해서 병행돼야 하고, 설치 장소가 프로젝트와 내용적으로 관련성이 있는 경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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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녀상은 지난해 7월 카셀대 총학생회 주도로 독일 대학 중엔 처음으로 캠퍼스 내에 설치됐다. 학생회는 ‘카셀 도쿠멘타’라는 국제 현대미술 축제에 맞춰 설치를 기획했고, 한국 관련 독일단체 코리아협의회가 소녀상 조각가 김운성·김서경 작가에게 기증받아 카셀대 총학생회에 소녀상을 영구 대여했다. 소녀상은 대학의 공식 허가를 거쳐 7월8일 세워졌다.

위기에 빠진 소녀상은 이것만이 아니다. 독일 베를린 미테구에 2020년 9월 말 설치된 소녀상 역시 지속적인 철거 압박을 받고 있다. 이 소녀상이 세워지자 지난해 4월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까지 나서 “계속 설치되어 있는 것은 유감”이라며 철거를 요구했다. 그럼에도 소녀상이 제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현지 여성·인권단체의 저항과 한국 정부의 보이지 않는 외교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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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윤석열 정부가 한-일 간 민감한 역사 문제에 일방적으로 백기를 든 상황이어서 앞날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일본 정부는 2015년 12월 ‘위안부 합의’를 통해 위안부 문제는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고 선언하고도 세계 곳곳에 세워진 소녀상 철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위안부 문제를 다시는 되풀이되어선 안 될 보편적 인권 문제로 보지 않고, 한-일 간 역사 전쟁의 소재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기억연대는 10일 보도자료를 내어 그동안 이뤄진 일본 정부의 ‘압박’을 상세히 설명했다. 소녀상이 설치된 뒤 3일 만에 독일 프랑크푸르트 일본 총영사가 카셀대 총장을 만나 ‘소녀상이 반일 감정을 조장해 카셀 지역의 평화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철거를 요청했고, 그 뒤로도 대학이 업무에 지장을 느낄 정도로 일본 총영사의 지속적 방문이 이뤄졌다. 또 일본 극우들의 악성 편지와 메일에 시달려야 했다. 코리아협의회는 이번 기습 철거에 항의해 조만간 카셀대에서 대규모 규탄 행사에 나설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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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노지원 특파원

zo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