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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아시아·태평양

인도와 ‘히말라야 육박전’…중국의 ‘치고 빠지기’ 노림수는?

등록 :2020-06-19 09:59수정 :2020-06-20 16:31

[정의길의 세계만사]
히말라야 라다크 갈완 계곡서 중국-인도 수십명 숨지는 ‘유혈 충돌’
100년전 영국이 설정한 해발 4천미터 국경선 ‘맥마흔 라인’이 발단
한국전쟁 제2전선으로 윈난 내부를 공격했던 국민당 잔당들이 중국 국경을 넘기 전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국전쟁 제2전선으로 윈난 내부를 공격했던 국민당 잔당들이 중국 국경을 넘기 전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중국과 인도는 왜 육박전을 하나?

중국과 인도는 지난 15일(현지시각) 히말라야 산맥 자락 라다크 지역의 갈완 계곡에서 군사충돌을 벌여, 인도 쪽에서만 적어도 20명이 사망했다. 두 나라의 군대가 서로 사망자를 낼 정도로 충돌했는데도, 양쪽은 화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몽둥이와 돌멩이를 가지고 육박전을 벌인 것이다.

두 나라는 과거 국경분쟁으로 전쟁까지 치렀다. 국경지대에서 분쟁 우려로 이 지역 등을 순찰하는 군이 무기를 소지하지 않기로 서로 합의한 것이 육박전의 직접적인 배경이기는 하다. 하지만 사상자까지 발생하는 군사충돌에서 화기를 동원하지 않고 육박전으로 일관한 것은, 전쟁사에서 기이한 사례임이 틀림없다. 양국 관계의 오랜 역사적 맥락과 중국의 전략이 맞물린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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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전쟁은 심리전이다. 이를 위해 상대나 주변의 예상을 깨는 파격적이고 돌발적인 행보를 한다.

현대 중국 건국의 아버지 마오쩌둥 전 주석에게 전쟁이란 심리전이다. 또 전쟁의 승리란 적을 심리적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적이 자신을 깔보지 않게 하고, 두려움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승리했다 해도, 적에게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심지 못하면 결코 승리한 것이 아니다. 또,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패배해도, 적에게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심었다면 승리한 것이다.

이는 마오쩌둥과 중국 지도부의 일관된 전쟁관이다. 건국 이후 중국은 1950년 한국전쟁, 1958년부터 20년간 계속된 진먼 포격전, 1962년 중-인 전쟁, 1969년 중-소 국경분쟁, 1979년 중-월(중국-베트남) 전쟁을 벌여왔다. 이 전쟁이나 분쟁에서 중국은 중-인 전쟁을 제외하고는 군사적으로 승리했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중국은 이 전쟁들에서 상대를 심리적으로 제압하고, 중국에 대한 두려움을 심는 데 성공했다. 결과적으로 중국에게 이 전쟁과 분쟁은 모두 승리한 것이다.

중국은 적을 심리적으로 제압하는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상대나 주변의 예상을 깨는 전격적인 개전 등 파격적이고 돌발적인 행보를 한다. 전격적으로 긴장을 고조시키면서도 결코 일정 선을 넘지 않는 치밀함을 보인다.

전격적인 참전을 하며 100만대군을 파견한 한국전쟁, 대만이 장악한 진먼섬에 갑자기 몇만 발의 포탄을 쏘고, 이를 20년 동안 주기적으로 감행한 진먼 포격전, 전쟁이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됐던 히말라야 산악 지대를 전격적으로 침공하고는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포한 중-인 전쟁, 소련(옛소련)의 국경침입에 대규모 군을 동원해 정규전까지 벌인 중-소 국경분쟁, 전격적으로 침공하고는 전격적으로 철수한 중-월 전쟁 모두가 그런 양상을 보여준다.

이 분쟁들에서 중국은 전격적인 개전과 참전 등으로 예기치 않던 선공을 하며, 상대를 충격과 혼란에 빠트려놓고는 일방적인 철군과 휴전으로 매듭을 짓거나, 긴장을 꾸준히 관리했다.

1979년 2월23일 베트남 군인들이 랑손성 경계선 230㎞를 따라 침공해 온 중국군에 맞서 포를 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79년 2월23일 베트남 군인들이 랑손성 경계선 230㎞를 따라 침공해 온 중국군에 맞서 포를 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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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1979년 베트남을 침공해 2주간 ‘제한된 징벌적 공격’을 실시하고는 즉각 퇴각했다. 일종의 ‘긴장 관리’다.

한국전쟁 때 미국은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어 평안북도까지 진군해 출몰하고 나서야, 중국의 참전을 파악했다. 미군은 충격과 공포의 대혼란 속에서 다시 38선 이남까지 후퇴해야 했다. 한국전쟁은 미국이 이기지 못한 첫 전쟁이었다. 중국은 미국을 심리적으로 제압하는 효과를 거뒀다.

진먼 포격전은 중국이 분쟁을 어떻게 이용하고 관리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대만의 국민당 정부가 장악한 진먼섬은 중국 본토에서 2㎞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대만에게는 최일선 방위선이고, 본토의 중국에게는 유사시에 본토로 침공할 수 있는 전진기지가 될 우려가 있는 섬이다. 국공내전 때 인민해방군은 이 섬을 놓고 국부군에게 큰 패퇴를 당하기도 했다. 중국에게 진먼섬은 자신의 안위뿐만 아니라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는 것을 세계에 알리는 소재였다.

중국은 1958년 8월23일 전격적으로 진먼섬에 포격을 가했다. 전투 개시 2시간 만에 4만발, 그날 하루만 5만7천발의 포탄이 퍼부었다. 양쪽은 한달 동안 이런 국지전을 계속했다. 2차 대만해협 위기라 불린 이 사태 때 미국은 전면전으로 비화할 것을 우려했다. 당시 미국이 대만 국민당 정부에 “진먼섬은 미-대만 방위조약의 대상이 아니”라며 포기할 것을 종용한 사실이 훗날 알려지기도 했다. 중국은 미국을 다시 심리적으로 제압한 것이다.

한 달 동안의 국지전이 멈춘 뒤에도 중국의 포격은 계속됐다. 중국은 10월 들어 ‘7일간의 포격 중지’를 일방적으로 발표하면서 포격을 완화했다. 10월 말에는 ‘하루씩 걸러 포격한다’고 발표하고는 포격 주기를 넓히다가, 1979년 1월1일 미-중이 정식 수교하자 포격을 완전히 중단했다. 그동안 중국은 진먼섬에 대한 포격을 의례처럼 주기적으로 실시했었다. 대만이 중국의 일부임을, 그래서 대만 문제를 가지고 중국에 도전하지 말라는 긴장 관리였다.

중-월 전쟁은 중국의 전쟁관을 가장 잘 보여준 사례다. 중국이 핵심이익 앞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상대에게 보여주고는 심리적인, 정치적인 승리를 쟁취한 사례다. 중국과 베트남은 베트남 전쟁 때 미국에 맞서 같이 싸웠던 사회주의 혈맹이었다. 하지만 베트남이 전쟁에서 승리한 뒤 캄보디아를 침공하는 등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영향력을 확장하고 소련과 밀월관계로 들어가자, 양국 관계는 악화했다. 특히, 베트남이 전쟁 때 미군의 해군기지로 사용됐던 깜라인만 기지를 소련에 조차하겠다고 하자, 중국은 행동에 나섰다.

소련 견제를 위해 이미 미국과 화해를 시작한 중국은 1979년 1월1일부로 미국과 정식수교했다. 수교 뒤 미국을 방문한 중국의 당시 지도자 덩샤오핑은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베트남 응징을 통보했다. 그는 “어린아이가 못되게 굴고 있다. 이제 볼기를 맞을 때”라며 “제한적인 적절한 교훈”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했다. 이는 베트남을 때려서 소련을 으르는 전형적인 중국의 성동격서 작전이었다. 미국은 군사위성을 띄워서 중국에게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지원 의사를 밝혔다.

이런 의사를 밝힌 지 2주 뒤인 1979년 2월17일 중국 인민해방군은 14개 사단병력을 동원해 전격적으로 베트남을 침공했다. 3월16일까지 2주간 동안 진행된 이 전쟁에서 중국은 ‘제한된 징벌적 공격’을 실시하고는 즉각 퇴각했다. 중국은 “베트남 수도인 하노이까지 진격할 수 있는 전과를 올린 뒤 퇴각했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 전쟁은 현대 중국이 치른 전쟁 중 가장 군사적으로 실패한 전쟁이었다. 중국군은 베트남전에 단련된 베트남군의 반격을 받아서 전술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이 전쟁에서 인민해방군의 전사자는 10년 넘게 누적된 미군의 베트남전 전사자보다도 많았다. 인민해방군 퇴각은 애초에 계획된 전략이기도 했으나, 전쟁이 계속됐다면 베트남의 반격에 밀려 이뤄졌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부터 소련과 베트남을 심리적으로 제압하고 견제하려는 전략적 목표를 겨냥했음을 고려하면, 성공한 전쟁이었다. 반소 미-중연대를 실질적으로 가동했고, 중국은 자신의 핵심이익이 침해되면 전면전도 불사한다는 단호함을 보여줬다. 전쟁 뒤 화궈펑 당시 주석은 소련을 겨냥해 “우리는 결국 호랑이의 엉덩이를 만질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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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중국은 이번에 육박전이 벌어진 인도와의 국경 지역을 전격 침공했다. 32일간의 이 전쟁은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전쟁’이었다.

이번에 육박전을 벌인 중국과 인도의 관계 역시 상대의 허를 찌르는 전격적이고 돌발적인 행동을 해서 심리적으로 제압하고는 긴장을 관리하는 중국의 전략에 따라 주도됐다. 두 나라의 분쟁거리인 국경 문제는 사실 서로를 견제하고 관리하는 수단이다.

중-인 국경분쟁의 기원은 영국이 만들었다. 현재의 중국-인도 국경선은 영국이 그은 것이다. 중국에서 신해혁명(1911년)으로 청 제국이 완전히 몰락하자, 1913년 인도와 접경한 티베트가 독립을 선언했다. 영국이 이를 인정했다. 당시 인도를 식민통치하던 영국은 티베트도 자신의 영향권을 만들어, 청뿐 아니라 남하하는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했다. 영국은 이를 위해 티베트의 독립을 공인한 뒤 인도-티베트 국경선을 획정하는 1914년 심라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주도한 영국 외교관 헨리 맥마흔의 이름을 따서 ‘맥마흔 라인’이라고 불리는 인도-티베트 국경선은 양쪽의 역사적 국경지대인 히말라야 산맥 지역의 많은 부분을 인도로 넘기는 쪽으로 그어졌다. 히말라야 산맥 동단인 현재의 아루나찰프라데시 등을 인도령으로 확정한 것 등이 대표적 예다. 남한의 3분의 2가 넘는 8만3천㎢ 면적의 아루나찰프라데시는 역사적으로 티베트권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이번에 중국과 인도가 육박전을 벌인 라다크가 포함된 카슈미르는 중국과 인도, 파키스탄이 서로 영유권 분쟁을 벌여, 아직도 정식 국경이 획정되지 않은 곳이다. 맥마흔 라인 때문이다.

맥마흔 라인이 그어진 심라조약 체결 당시 중국은 이 맥마흔 라인을 인정하지 않고 퇴장했다. 이 때문에 중국은 줄곧 식민시대 때 제국주의 영국의 이익에 따라 그어진 중-인 국경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중국과 인도의 국경은 히말라야 산맥이다. 이번에 육박전이 벌어진 라다크 지역은 히말라야 산맥의 북쪽 사면에서 더 북쪽으로 들어간 곳이다. 중국은 ‘인도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서 북쪽으로 쑥 들어와 영토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입장이다.

1949년 국공내전에 승리한 중국 공산당이 전격적으로 티베트를 다시 점령하고 중국의 일부로 선포했다. 그러면서, 맥마흔 라인이 중국에 불리하게 그어졌다고 주장하며 중-인 국경 문제를 제기해왔다. 중국에는 국경 자체도 문제이기는 했으나, 본질적으로는 티베트 문제 때문이다. 티베트 문제에 대한 외부의 개입을 막는 구실이다. 티베트와 접경한 인도와의 분쟁을 관리하며 티베트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고, 인도의 개입도 막으려는 것이다.

1962년 10월20일 중국은 이번에 육박전이 벌어진 카슈미르의 중국령 지역인 악사이친과 맥마흔 라인의 주요 대상인 아루나찰프라데시 등 양국의 국경분쟁 지역을 전격적으로 침공해, 중-인 전쟁을 개전했다.

한 달 하고도 하루가 더 걸린 32일간의 전쟁은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전쟁’이었다. 대부분의 전투가 해발 4천m 이상에서 벌어졌고, 대부분의 보급은 인력으로 직접 조달됐다. 이 지역에서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을 못했는데, 중국은 그 허를 찌른 것이었다.

중국은 이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압승했다. 중국은 카슈미르에서 인도령 깊숙히 진군해 점령했고, 대부분의 지역에서 인도군을 패퇴시켰다. 하지만, 중국은 그 점령한 영토를 자신의 영토로 영유하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포한 뒤 철군했다. 그리고는 맥마흔 라인에 따라서 대략 그어진 ‘실질통제선’ 밖으로 물러났다. 저우언라이 당시 중국 총리는 1959년 자와할랄 네루 인도 당시 총리에게 서한을 보내, 맥마흔 라인을 존중하는 실질통제선을 선포했다. 자신들이 주장하던 영유권을 실질적으로 확보할 기회였는데도, 중국은 이를 추구하지 않았다.

중국군과 인도군의 충돌이 일어났던 인도 북부 라다크 지역의 갈완 계곡을 찍은 위성사진. 사진은 양국 충돌 전인 지난 9일에 찍은 것이다. 로이터 연합뉴스
중국군과 인도군의 충돌이 일어났던 인도 북부 라다크 지역의 갈완 계곡을 찍은 위성사진. 사진은 양국 충돌 전인 지난 9일에 찍은 것이다.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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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인’ 전쟁 원인은 영유권보다 ‘티베트 문제’였다. 인도가 달라이 라마의 망명을 받아들이고 티베트의 독립기지로 허용했던 것이다. 

그럼 중국이 악전고투의 ‘가장 높은 전쟁’을 치른 이유가 무엇인가? 티베트 문제 때문이었다. 1959년 티베트에서 반중국 폭동이 일어났고, 중국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해, 임시정부를 세웠다. 인도가 달라이 라마를 망명을 받아들이고, 인도를 티베트의 독립기지로 허용한 것이다. 인도는 또 실질통제선에서 중국군의 순찰을 방해하고, 중국령 쪽으로 들어와 초소를 세우기도 했다. 외교적 해결을 요구하는 중국의 요청도 거부했다.

중국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이 전쟁에서 인도를 제압한 것이다. 군사적으로 승리했을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중국에 대한 도전을 단념케 했다. 만약 중국이 점령한 지역을 자국령으로 선포했다면, 인도의 도전은 계속되고 관계가 회복될 수 없었을 것이다. 중국은 점령 지역에서 철수해줌으로써, 인도의 체면도 살려줬다. 긴장을 관리하려 한 것이다.

그 후에도 양국의 국경분쟁은 계속됐다. 그러나 이 국경분쟁은 양국에 사실 심각하고 실질적인 안보문제가 아니다. 두 나라의 지정적인 상황 때문에 역사적으로 서로에게 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이 아니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히말라야 산맥은 두 나라의 역사적인 교류를 항상 제한해왔다. 접경하고 있으나, 두 나라의 군사적 충돌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교류조차 거의 불가능하게 했다.

중국과 인도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별개의 세력으로 살아왔다. 현재도 안보 측면에서 정면으로 충돌할 여지는 거의 없다. 서로의 영역을 인정한다면, 원만한 관계가 안될 수 없다. 하지만 티베트 문제 등 서로의 영역을 건드릴 땐, 국경분쟁도 심화하는 등 양쪽은 긴장을 고조하고 관리했다.

1962년 전쟁 뒤 냉각관계였던 양국의 관계는 인도를 지원하던 소련이 해체된 뒤 전기를 맞았다. 이미 양국은 1975년을 마지막으로 총격을 교환하는 분쟁은 하지 않았다. 양국은 1997년 상호조약을 체결하고는 “실질통제선의 2㎞ 안에서는 어느 쪽도 화기를 발사하지 않고, 명백한 군사작전이나 총과 폭발물을 동원한 사냥도 하지 않는다”고 합의했다.

그 이후에도 양국의 국경분쟁은 계속됐으나, 이번처럼 화기를 동원하지 않은 육박전으로 일관했다. 육박전을 주기적으로 벌이면서도 양국 정상이 회담하는 기묘한 관계를 연출해왔다. 지난 2018년에는 시진핑 중국 주석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우한에서 정상회담을 갖고는 양국 관계의 새로운 시대를 선언하기도 했다.

인도 군인들이 18일(현지시각) 남부 수라야펫에서 열린 동료 군인 산토쉬 바부 대령의 장례식장에 참석해 있다. 바부 대령은 지난 15일 중국과 접한 라다크 지역에서 빚어진 양국간 충돌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수라야펫/AP 연합뉴스
인도 군인들이 18일(현지시각) 남부 수라야펫에서 열린 동료 군인 산토쉬 바부 대령의 장례식장에 참석해 있다. 바부 대령은 지난 15일 중국과 접한 라다크 지역에서 빚어진 양국간 충돌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수라야펫/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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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인도가 호응하자 육박전이 전개됐다. 그러나 양국은 즉각 전화회담을 갖고 긴장 완화를 다짐했다.

하지만 그 직후부터 양국의 국경분쟁은 다시 재현되기 시작했다. 미국이 중국을 포위하려는 새로운 전략인 인도-태평양 전략이 나오고, 인도가 호응하면서부터다. 지난해 인도 북동부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아루나찰프라데시 지역에서 양쪽의 충돌이 간헐적으로 터져 나왔고, 이번 5월 들어 라다크의 판공 호수에서 충돌했다. 사실상 중국 쪽이 먼저 도발한 것이다.

이번 충돌도 중국군 병력이 압도적인 것을 고려하면, 중국 쪽이 사실상 도발한 것으로 보인다. 인도 쪽에서만 20명 이상이 사망했으니 1962년 전쟁 이후 최악의 분쟁이다. (중국은 사상자 수를 밝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양쪽은 육박전으로 일관했고, 양국 외교장관은 즉각 전화회담을 갖고는 긴장 완화를 다짐했다. 모디 인도 총리는 자국군 병사들이 수십명이나 사망했는데도 중국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는 희생당한 자국군 병사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며 “인도는 평화를 원하나, 도발을 받았을 때는 그것이 어떠한 상황이라도 적절한 대응을 할 능력이 있다”고만 말했다.

중국은 다시 진먼섬 포격전 같은 긴장 관리 분쟁을 선택했고, 인도 역시 그에 맞춘 대응을 할 것을 시사한 것이다. 일종의 약속 대련 같은 것이다. 가장 높은 지역에서 육박전으로 일관하면서도 정상회담을 갖는 중국과 인도의 관계는, 전쟁과 평화가 동전의 양면임을 새삼 말하고 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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