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오의 나라’ 이집트에 새로운 파라오가 등장했다. 26일 이틀 일정으로 막을 올린 이집트 대선은 화려한 대관식을 위한 식전행사에 불과해 보인다. 최종 개표 결과는 6월 초에나 확정되지만, 압도적 여론을 등에 업은 압둘팟타흐 시시(59) 전 국방장관의 당선을 의심하는 이들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는 선거에 앞서 지지를 호소하는 대신 “투표 참여자가 4000만명 정도는 됐으면 좋겠다”고 여유를 부렸다. 전체 유권자는 약 5300만명이다. 이집트 과도정부는 투표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28일까지 투표를 하루 연장했다.
이집트 사상 처음으로 민주선거를 통해 집권한 무함마드 무르시 정권을 무너뜨린 지난해 7월 쿠데타를 주도한 이후, 시시 전 장관의 대중적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쿠데타 이후 7개월여 동안 1000명 이상이 반군부 시위 도중 목숨을 잃었지만, 카이로의 거리에서 시시의 모습을 담은 포스터는 늘어만 갔다. 그의 사진이 박힌 초콜릿 선물 세트가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한 것도 오래다. 호스니 무바라크의 30년 독재를 무너뜨린 2011년 1월 혁명 이후 불과 40개월 남짓 만에, 이집트는 그렇게 과거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이집트 군부의 막강한 힘은 ‘지갑’에서 나온다. 이른바 ‘군사경제’ 또는 ‘장교경제’로 불리는 군부의 영리활동은 군사독재 회귀의 마중물이었다. 군부의 영리활동은 ‘회색경제’로도 불린다. 그 자체가 ‘군사기밀’로 취급돼 실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터내셔널비지니스타임스>는 지난달 “그나마 알려진 정보를 종합하면, 군부의 영리활동은 많게는 이집트 국내총생산(GDP)의 40%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군부는 “1%도 안된다”고 엄살을 부린다.
군부의 영리활동은 좌파 성향이 강했던 가말 압델 나세르 정권의 국유화 정책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국유화 과정에서 군부가 국영자산 운영을 떠맡으면서 자연스레 영리활동에 나서게 됐다. 1979년 이스라엘과 평화협정 체결 뒤 군비감축 과정에서 ‘퇴직 군인 일자리 만들기’를 명분으로 군부경제는 몸집을 더욱 불렸다. 중동문제 전문매체 <중동연구정보프로젝트>(MERIP)는 “이집트 군부의 영리활동이 내각의 국방생산부와 독립기구인 아랍산업화기구(AOI), 국가서비스프로젝트기구(NSPO) 등 크게 3개 조직을 통해 전방위적으로 이뤄진다”고 짚었다.
이집트 군은 파스타·생수·부탄가스·올리브유·구두약 등 다양한 생필품을 생산·판매한다. 평면텔레비전과 냉장고, 신생아용 인큐베이터와 피아트 자동차의 조립·생산도 군부의 몫이다. 2011년 무바라크 독재가 무너진 뒤 처음 치러진 의회 선거 때 사용된 기표소도 군부가 제작·납품했다.
징병제를 통해 확보한 약 50만명의 병사들은 ‘저임금 노동자’다. 각종 보조금과 세제 혜택도 군부경제를 살찌우고 있다. 군사시설용으로 확보한 막대한 토지는 ‘부동산 자산’이다. 군사용 중장비는 ‘렌트’ 사업에 동원된다. 민간자본을 끌어들여 리조트를 비롯한 각종 부동산 개발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말 그대로 ‘군산동일체’다. 로버트 스프링보르그 영국 킹스칼리지 교수는 <인터내셔널비지니스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군부가 요직을 독점하고, 관급 공사와 계약을 따내고, 다국적 기업의 협력업체 노릇을 하고 있다. 국가 차원의 경제개발 전략을 주관하는 것도 군부”라고 지적했다.
군부의 자금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있다. 무바라크 정권 붕괴 뒤 이집트 중앙은행은 외환보유고 부족으로 식량 등 생필품 수입에 어려움을 겪었다. 2011년 12월 중앙은행의 텅 빈 금고를 대출금 10억달러로 채워준 것도 바로 군부였다. 당시 <알자지라> 방송은 “혁명 이후 경제적 위기 속에서도 군부는 초급장교들에게 매달 2400파운드(약 40만원) 가량의 보너스를 지급해왔다”고 전했다.
지난해 7월 쿠데타 이후 군부경제는 더욱 활황세를 타고 있다. 향후 20년 동안 모두 86억달러를 투입하게 될 수에즈 운하 개발프로젝트도 군부가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 정부는 지난 3월 아랍에미리트에 본사를 둔 아랍텍건설과 저소득층 거주용 주택 100만호 건설 계약을 맺었다. 사업비 400억달러 규모의 초대형 계약이다. 당시 직접 나서 이를 성사시킨 시시 전 장관은 곧바로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당시 그는 “군은 경제개발 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지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2011년 2월 무바라크 정권 붕괴 이후에도 군부는 권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독재자가 임명한 무함마드 탄타위 국방장관을 수장으로 군 수뇌부 21명이 가담해 꾸린 최고군사위원회(SCAF)가 혁명을 손쉽게 납치했다. 당시 정보사령관이던 시시 전 장관은 최연소 위원으로 위원회에 참가했다. 군부는 2012년 6월 무르시 대통령 취임 때까지 국정을 농단했다.
무르시 대통령은 취임 두달여 만에 군 수뇌부를 교체하고, 시시를 국방장관에 앉혔다. 그가 임명권자를 향해 총부리를 들이댄 것은 그로부터 불과 10개월 남짓만의 일이다. 1952년 나세르가 이끈 ‘자유장교단’의 쿠데타로 왕정이 무너진 이후, 이집트에서 민주선거로 뽑힌 민간정부가 집권한 기간은 무르시 정권 단 1년 뿐이다. ‘시시의 시대’가 열렸다. ‘카이로의 봄’은 시들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