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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제일반

서유구의 ‘타임캡슐’을 여는 희망의 괭이질

등록 :2013-06-25 20:02수정 :2013-06-25 21:08

정명현 임원경제연구소장은 연구소 근처에 있는 고양시 구산동의 텃밭에서 <임원경제지>에 기술한 방식 그대로 콩 농사를 짓고 있다. 21일 연구원들과 함께 김을 매던 중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정명현 임원경제연구소장은 연구소 근처에 있는 고양시 구산동의 텃밭에서 <임원경제지>에 기술한 방식 그대로 콩 농사를 짓고 있다. 21일 연구원들과 함께 김을 매던 중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나는 농부다] 임원경제연구소 정명현 소장
생명공학을 전공했던 정명현씨는 ‘임원경제지’와 인연을 맺으면서 농업으로 시야를 돌렸다.
‘임원경제지’를 지은 서유구의 고향 파주로 내려와 현장성에 몸을 푹 담근 연구의 세계로 들어섰다.

그가 밭을 가는 모습을 보면 춤추는 것 같다. 훌쩍한 키에 맨발로 밭을 휘적거리는 그의 몸놀림에는 신명이 절로 묻어난다. 왜 농사를 짓나요? 농업이 천대받고 있는 이 시대에 그토록 힘들어 보이는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을 보면 누구라도 묻지 않을 수 없는 물음이다. 그의 답변은 의외였다. “몸을 놀리는 게 좋아요. 명상이 따로 없어요.” 머리가 맑아지고 몸도 가벼워지고. 따사로운 햇살도, 싱그러운 바람도 그를 북돋운다.

임원경제연구소의 정명현(45) 소장은 대학에서 생명공학을 전공했다. “인류의 질병을 고치고 식량난을 해결할지도 모른다는 대의명분에 끌렸죠.” 지금은 <임원경제지>를 연구하는 한학자의 길을 가고 있다. “생명공학을 연구하다 보면 대장균에 자외선을 쬐는 실험을 많이 해요. 그때마다 그 균들이 고통에 자지러지듯 꿈틀거리는 모습이 상상되었어요.” 타고난 생태적 감수성일까. 아무튼 생명에 대한 이 예민한 감수성은 그의 삶의 방향을 이끌어나갔다. “생명공학은 인간을 살리는 학문이 아니라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위험한 학문이 아닌가.” 오랜 고민 끝에 그는 전공을 바꿔 애초 맘에 끌리던 농업 분야로 시야를 돌렸다. <임원경제지>와 인연을 맺게 됐다.

그가 농사에 눈뜨게 된 인연은 그보다 좀 앞섰다. 청년 시절, 고혈압으로 한움큼씩 약을 드시는 어머니 드릴 쑥을 뜯으러 들로 산으로 뛰어다녔다. 석사 과정을 밟던 30대 초부터는 우면산 기슭에 손바닥만한 땅을 일궈놓고 똥오줌 받아가며 농사를 지었다. 그것이 성에 차지 않아 ‘시골 가서 농사짓고 사는 삶’ 타령하던 그는 2003년 <임원경제지>를 만나면서 본격적인 탈주를 시작했다. 2007년 <임원경제지>를 지은 풍석 서유구의 고향, 파주로 내려왔다. 2년 뒤에는 아예 연구소를 파주로 옮겨왔다. 작가가 호흡하던 시공간의 결을 오롯이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학문과 삶이 겉돌지 않도록 자신을 불러세울 것만 같은 예감이 그를 잡아끌었다. 현장성에 몸을 푹 담근 연구의 세계로 들어섰다.

연구소에서 <임원경제지>를 설명하는 정 소장.
연구소에서 <임원경제지>를 설명하는 정 소장.

그에게 ‘임원경제지’는
현대문명의 한계를 넘어서는
발상이 샘솟는 수원지다
삽질, 괭이질을 하면서
그는 그 샘을 파고 있는 셈이다

7년째 살고 있는 파주의 전원성은 농경문화에 대한 상상력이 사그라지지 않도록 심지를 돋워주고, 고루한 자구 번역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원천이다. 2009년에 <임원경제지>의 16편 중 제1편에 해당하는 ‘본리지’ 3권과 개관서를 펴냈다. 본리지는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곡식 재배와 땅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그의 삶에서 농사가 먼저인지 번역이 먼저인지를 가릴 수는 없다. 그 둘은 떼어낼 수 없을 정도로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어서다.

“글이 쓰인 시대의 맥락과 저자의 뜻을 오롯이 되살려내는 번역을 하기 위해서도 농사를 짓지 않을 수 없지요.” 구태여 농사를 지어야만 그 시대가 손에 잡힐까? “문헌만 가지고 연구하다 보면 한계가 있어요. 문자 해석이 아무리 정밀해도 실제를 모른다면 거기 담긴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들지요. 더욱이 농경사회에서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적은 책이잖아요. 실제로 농사를 지으면서 번역에도 더 자신이 붙더군요.”

‘시공을 통틀어 하루도 몰라서는 안 되는 일이 농사’라는 서유구의 확신은 정명현의 삶과 학문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서유구 선생은 농사법을 정리하면서, 실제로 농사지어보고 썼어요.” 그의 번역도 그렇다. 그가 마당 한편에 밀을 심어 기르고, 닭을 풀어놓아 기르는 까닭이다. 그의 농사 방법은 요즘 농사 방법과는 딴판이다. 서유구가 꿈꾸던 농사법, <임원경제지>에 새겨진 농법대로 한다. 밀을 심더라도 두둑에 골을 깊게 파는 방식으로 하고, 콩을 심더라도 한 바가지나 되도록 구덩이를 파고 심는다. 서유구는 왜 그렇게 했을까. 그의 몸놀림과 마음 씀씀이까지 헤아리면서 지금의 언어로 풀이하고 우리의 지혜로 되살려내려고 한다.

농사를 지으면서 <임원경제지>를 번역하는 그의 맘에 담긴 시공간의 지평은 넓다. 포부는 우람하다. “몇십년 안에 석유가 고갈될 텐데 석유문명을 살아온 인류는 어떻게 살아갈까요. 임원경제지에 그 문제를 풀어나갈 지혜가 숨어 있다고 봐요.” 우리 시대에 새로이 일궈갈 문명의 방향을 임원경제지라는 보물지도에서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예감이 그를 논밭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닐지 모르죠. 하지만 우선 번역이라도 제대로 해놓으면 언젠가 재창조의 날이 열리겠지요.” 그에게 <임원경제지>는 현대문명의 한계를 넘어서는 발상이 샘솟는 수원지다. 삽질, 괭이질을 하면서 그는 그 샘을 파고 있는 셈이다. 지금 우리네 삶의 흥청댐과 소란함, 불모성이 농사의 숨결을 잃어버려서 그런 것은 아닐까? 그에게 <임원경제지>는 ‘오래된 미래’를 여는 열쇠이기도 하다. 수천년을 동아시아에서 살아온 이들이 일궈온 농경문화의 지혜가 켜켜이 녹아 있는 <임원경제지>는 200년 전 지속가능한 사회의 최정상에서 우리 사회로 보내온 타임캡슐 같은 것이다.

귀족으로, 벼슬아치로 살아온 삶을 돌아보며, “헛되이 곡식만 축내며 세상에 보탬이 되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고 반성하던 서유구. 스스로 농사짓고 물고기 잡으며 백성들의 주름살을 펴는 데 도움 될 만한 지식을 찾아 모으려 밤잠을 못 이루던 그의 삶에 대한 치열한 탐구와 자기화는 농사짓는 학자 정명현의 삶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는 틈만 나면 예닐곱 명의 연구소 사람들과 더불어 밭에 가곤 한다. 농사를 통해 삶을 생각하고, 자립을 꿈꾸는 임원경제연구소의 기풍을 풀무질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한반도에 임원경제 실현지를 일구는 동력이 되기를 꿈꾸면서.

요즈음 그는 파주·고양 지역의 도시농부들과 ‘자급경제 도시농부 협동조합’을 만드는 일에도 힘을 쏟고 있다. <임원경제지>에 나오는 우리 술 ‘부의주’를 빚어 벗들이나 후원자들과 나누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다. 그의 행진은 한자의 미로로 짜인 보물섬에 깃들어 있는 과거와 소통하고, 작가와 소통하는 것을 넘어, 지금 여기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겨냥하는 것이다. 농사가 그저 학문과 번역의 도구만이 아니기에 그에겐 그토록 신명난 일이 아닐까.

이현숙 텃밭지도사아카데미 대표


<임원경제지>는 농사와 농촌생활의 지식과 지혜를 담은 16지 113권의 조선시대 최대의 실용백과사전이다. 고양/김봉규 기자
<임원경제지>는 농사와 농촌생활의 지식과 지혜를 담은 16지 113권의 조선시대 최대의 실용백과사전이다. 고양/김봉규 기자

>>>임원경제지란

조선 농경사회 ‘생활 백과’

<임원경제지>는 조선시대 농경사회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삶의 지혜를 두루 담아낸 백과사전이다. ‘실용 잡학’에 심취한 풍석 서유구 선생(1764~1845)이 곡식, 채소, 화훼, 과실 등의 농사, 먹고 입고 문제, 기상과 천문, 축산과 어업, 건축, 정신수양과 섭생, 의학, 생활의례, 풍수에 이르기까지 농촌생활에 꼭 필요한 일들을 세세하게 다룬 모두 16개 분야 113권 분량의 방대한 저술이다. 독서법 활쏘기 그림 등의 교양생활, 정원을 가꾸고 애완동물을 사육하는 예술문화생활, 재산증식과 절약 및 화재와 절도예방 방법을 친절하게 안내한 생활경제백과도 포함돼 있다. 한자로는 무려 253만 자이고, 저술하는데 40여년이 걸렸다.

정조 때 과거에 합격해 당상관의 고위직을 두루 거친 서유구는 토갱지병(土羹紙餠, 흙으로 끓인 국이나 종이로 만든 떡)과 같은 관념적 학문에 염증을 느껴, 심지어 사대부라면 누구나 즐기던 시 짓기도 거의 하지 않았다. 몸을 놀려 효과를 바로 낼 수 있는 실용학문을 평생 추구했다. <임원경제지>는 19세기 들어 조선이 기울어가던 무렵, 조선의 문명을 농촌에서부터 건강하게 회복하려 했던 한 지식인이 남긴 조선시대 최고의 백과사전으로, ‘조선판 브래태니커’로 불려지기도 한다.

그 가치의 무게로 보나 양의 방대함으로 보나, 임원경제지를 번역하는 일은 나라가 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나라가 그 일을 방치하는 사이 그가 나서 독지가(DYB최선어학원 송오현 원장)의 후원을 받아 2003년부터 40여 연구자들을 묶어세워 번역을 이끌어 왔다. 올해부터는 임원경제연구소가 한국고전번역원 협력연구소로 지정되어 뒤늦게나마 정부 지원을 받아 대여섯명의 상근번역팀을 꾸릴 수 있게 됐다.

정 소장은 “애초 내년 3월에 113권의 번역을 마무리할 예정이었으나, 이제 겨우 16개지 중 본리지 하나와 개관서를 번역했다. 앞으로 10년은 더 걸릴 것 같다. 속도를 더 내기 위해서는 뜻있는 시민들의 후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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