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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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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벼락 거지’라는 신조어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본인의 소득에는 큰 변화가 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유한 주식·부동산 가격이 급등해 자신이 상대적으로 빈곤해진 사람을 가리킨다. 최근 한국 증시가 벼락 거지가 된듯 한 느낌이다. 글로벌 주요국 증시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고 3년간 부진했던 중화권 증시마저 큰 폭으로 반등하고 있지만 한국 증시는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어 상대적 박탈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특히, 전 세계적 인공지능(AI) 붐 속에 한국 증시의 벼락 거지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인공지능 사이클 수혜에서 경쟁 관계인 대만 증시는 상승 랠리가 이어지면서 한국과 대만 간 주식시장 시가총액 역전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을 전후로 간혹 대만과 한국 간 시가총액 역전 현상이 일시적으로 나타난 적은 있지만 최근처럼 양국 간 시가총액 격차가 추세적으로 벌어진 적은 없었다. 지난 5월23일 기준 대만의 시가총액은 한국 시가총액의 약 1.27배 수준이다. 2023년 기준 대만 명목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한국 지디피의 44% 수준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 증시가 정말 벼락 거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과 대만 증시 간 차별화는 올해 들어 더욱 커지고 있다. 5월23일까지 코스피지수 연간 상승률은 2.5%에 그친 반면 대만 가권지수는 20.5% 급등했다. 양국 시가총액 격차가 확대되는 배경에는 일차적으로 양국 대장주의 주가 차별화가 있다. 대만 증시의 대장주인 티에스엠시(TSMC) 주가는 올해 들어서만 약 50% 가까이 급등한 반면, 삼성전자 주가는 약보합세이다. 기대와 달리 삼성전자를 비롯한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대만에 비해 인공지능 사이클 붐 및 미국 주도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서 큰 수혜를 얻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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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지난해 말부터 국내 반도체 수출이 큰 폭으로 증가하면서 국내 경기 회복을 주도하고 있다. 올해 지디피 성장률 전망을 2.1%에서 2.5%로 상향 조정한 한국은행도 그 배경으로 반도체 사이클 회복을 들었다. 국내 주력 산업인 반도체 업황 회복은 한국경제에 고무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업황 회복에만 만족해 자칫 기술혁신 투자 등에 뒤처진다면 한국 반도체 산업이 ‘끓는 물 속 개구리 신세’가 될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전 세계는 반도체 패권을 둘러싼 무한 반도체 전쟁, 즉 ‘칩 워(Chip War)’에 진입했다. 미국과 중국은 물론 유럽연합(EU)마저도 반도체 전쟁에 뛰어들면서 미국과 유럽연합의 경우 약 110조원에 달하는 보조금을 지원할 계획이다. 중국·일본·인도·사우디 등도 ‘칩 워’ 전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한국도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28조원을 지원할 계획을 밝히면서 ‘칩 워’ 참여를 선언했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뉴스다. 그러나 한국 반도체, 더 나아가 한국 증시가 벼락 거지 신세에서 벗어날지는 불확실하다. 반도체 전쟁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더욱 과감하고 적극적인 산업정책이 지속되어야 한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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