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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제일반

밀·옥수수 사재기·수출통제…우크라발 ‘식량전쟁’ 이제 시작일 뿐

등록 :2022-05-09 09:28수정 :2022-05-09 10:20

밀 곡창지대 우크라, 전쟁 여파로 생산 급감 불가피
러시아는 ‘식량 무기화’ 움직임…중국 등은 곡물 사재기
한국, 곡물 자급률 20%…KERI “식량 고물가 지속될 듯”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전세계 식량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지난 2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서부 흐멜니츠키에서 한 농부가 트랙터로 밀밭을 갈고 있다. 흐멜니츠키(우크라이나)/EPA 연합뉴스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전세계 식량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지난 2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서부 흐멜니츠키에서 한 농부가 트랙터로 밀밭을 갈고 있다. 흐멜니츠키(우크라이나)/EPA 연합뉴스

“우크라이나에 떨어진 포탄과 총탄은 인류가 그동안 경험한 것 이상의 굶주림을 겪게 할지 모른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인 지난 3월 초 폴란드 접경지역에 설치된 난민집결소를 방문한 데이비드 비즐리 세계식량계획(WFP) 사무총장이 한 말이다. 세계식량계획은 올 한해 동안 식량위기에 처할 인구가 1억37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한다. 특히 예멘, 시리아, 레바논, 수단, 에티오피아 등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은 기아선상에 내몰리게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세계은행도 식량위기를 경고하고 나섰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이미 가격이 크게 오른 식량이 앞으로도 계속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했다. 유엔 식량가격지수는 1960년대 처음 도입된 이래 가장 높은 수준이다.

개전 초기만 해도 국지전에 그칠 것으로 예상됐던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면서 지구촌에 식량위기의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과거 중동에서 벌어졌던 전쟁과 달리 이번 전쟁이 전 지구적 식량난으로 번지는 이유는 우크라이나가 세계적인 곡창지대이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흑색토는 비옥하기로 유명하다. 우크라이나는 경작지 비중이 57%(2019년 기준)로 가장 큰 나라다. 세계 최대 농업국가인 미국도 경작지 비중은 17%에 불과하다. 우크라이나는 전세계 밀 수출량의 8%, 옥수수는 13%, 해바라기유는 30%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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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위기가 장기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는 러시아의 공격이 우크라이나의 농업 기반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러시아 군대는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농토를 초토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농장에 설치된 발전기와 컴퓨터 등 농장 운영에 필요한 설비를 약탈하거나 파괴했다. 전쟁이 끝나고 농부들이 다시 돌아온다 하더라도 농장이 제대로 가동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식량 수출 루트도 파괴했다.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 봉쇄는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전쟁 전에 수확해둔 곡물을 수출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 농부들의 수중에 돈이 떨어져 농사 준비를 전혀 못 하고 있다고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보도했다. 우크라이나는 바닷길이 막힌 탓에 철도나 도로를 이용해야 하지만, 난민 이동과 맞물려 혼잡한 상황이라고 외신들은 전했다.

한술 더 떠 러시아는 식량을 ‘전쟁 무기화’ 할 태세다. 러시아 전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최근 텔레그램에 “적들에게 식량이 수출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글을 올렸다. 러시아는 세계 밀 수출 1위 국가다. 러시아는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곡물 수출이 제한될 수 있다. 아직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에 곡물은 포함되지 않았지만, 서방의 일부 은행이 곡물 수출입 업자들에게 대출을 거부하고 있다. 제재 위반으로 정부로부터 벌금을 부과받거나 언론의 비난을 받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서방의 제재가 확대되면 러시아의 곡물 수출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에 이어 러시아까지 곡물 수출이 제한된다면 중동과 아프리카는 물론 유럽의 일부 나라들까지 타격이 불가피하다. 밀 수입량의 80%를 우크라이나에 의존하는 레바논과 시리아, 리비아 등은 굶주림의 공포에 떨고 있는 상황이다. 러시아에 전체 밀 소비량의 60%를 의존하는 터키는 지난 3월 식량 물가가 70%나 올랐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로부터 전체 밀 수입량의 80%를 의존하는 이집트도 비상이 걸렸다.

유엔 식량농업기구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다른 대륙의 곡창지대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한다. 전세계 비료 생산의 15%를 차지하는 러시아 때문이다. 러시아와 함께 서방의 제재를 받고 있는 벨라루스도 비료 주성분인 칼리의 주요 생산국이다. 이들 지역의 비료 생산이 전쟁 여파로 줄어들면서 가격이 치솟고 있다. 비료 공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올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 남미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곡창지대도 타격이 불가피하다.

전쟁의 여파는 글로벌 경제를 흔들고 있다. 국제 무역은 상품과 원자재의 자유로운 공급이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 기대를 무너뜨리고 국제 식량과 원자재, 에너지 시장을 교란하고 있다. 곡물 가격 상승은 사료 가격과 밀가루 등의 곡물 가공품 가격으로 전이돼 축산물 및 식료품 물가 상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위기는 식량 해외의존도가 높은 나라들에 먼저 찾아온다. 세계은행은 식량 가격이 1%포인트 오를 때마다 1천만명이 빈곤에 빠진다고 경고한다.

설상가상으로 국제 빈곤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된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은 위기에 사용할 자금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미 코로나와 기후위기로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대출이 늘어난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전쟁발 식량위기까지 겹쳐 자금난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고 <파이낸셜 타임스>가 최근 보도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지난달 개발도상국들이 대출받은 돈은 1천억달러였는데, 실제 이들 나라가 코로나 사태 대응에 필요한 돈은 4조3천억달러였다. 재닛 옐런 미 재무부 장관은 최근 “기후위기 대응에만 수천조의 달러가 필요하다”며 코로나 및 우크라이나 전쟁 복구를 위해 선진국들의 더 많은 자금 지원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글로벌 식량전쟁으로 번질 태세다. 중국은 대대적인 곡물 확보에 나서고 있다. 세계 최대 옥수수 수입국인 중국은 최근 미국에서 옥수수 20만톤을 수입했는데, 역대급이었던 지난해 12월 수입량을 초과했다고 <블룸버그> 통신이 보도했다. 중국은 전쟁 전에는 우크라이나에서 옥수수를 주로 수입했다. 지난 한해 동안 중국이 우크라이나에서 수입한 옥수수는 824만톤으로 역대 최대였다. 중국의 식량 사재기는 식량 자급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기 때문이다. 농민의 고령화와 농촌의 도시화, 그리고 기후변화에 따른 물 부족 현상 등으로 농업 생산량을 유지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세계 최대 팜유 수출국인 인도네시아도 팜유 금수 조처를 내린 상태다. 인도네시아는 식용유에 쓰이는 팜올레인을 비롯해 팜유 제품 대부분의 수출을 무기한 금지해 국제 시장을 충격에 빠뜨렸다. 헝가리와 터키, 아르헨티나, 세르비아 등도 수출 통제에 나섰다. 식량 사재기와 수출 통제는 식량 가격을 올려 식량 수입국들의 경제에 큰 부담을 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도 식량위기로부터 결코 안전하지 않다. 국회예산정책처가 2021년 10월 ‘곡물 수급안정 사업·정책 분석’ 보고서를 통해 발표한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곡물을 7번째로 많이 수입한다. 2019년 기준 국내 곡물 전체 수요량 2104만톤 가운데 1558만톤을 수입에 의존한다. 국내 곡물 소비량의 70% 이상을 외국에서 사들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배합사료와 식품제조업에 사용되는 곡물은 대부분 수입에 의존한다. 이로 인해 국제 곡물 시장의 수급 및 가격 변동성에 고스란히 영향을 받는다. 특히 곡물 수입량은 일정한 데 반해 수입단가 변동성이 커서 연간 곡물 수입액이 적게는 4조원에서 많게는 7조원에 이른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3월31일 발간한 ‘우크라이나 사태의 국제곡물 시장 영향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전쟁 영향으로 국내 가공식품 소비자물가는 3.4~6.8%, 외식 소비자물가는 0.6~1.2%, 배합사료 생산자물가는 5.3~10.6%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우리나라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로부터 가공용 옥수수와 사료용 밀을 주로 수입하고 있다. 제분용 밀은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에서 수입한다). 전쟁으로 인한 유가 및 환율 상승 등의 영향을 고려하면 물가 상승 압력은 더욱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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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까지 우리나라 곡물 자급률은 90%를 넘었다. 하지만 농산물 시장 개방과 도시화, 산업화로 인해 자급률이 급격하게 떨어져 2020년 기준 식량 자급률은 45.8%, 사료를 포함한 곡물 자급률은 20.2%에 불과하다. 쌀 자급률은 90%를 넘어 ‘쌀이 남아돈다’는 말이 나오지만, 쌀이 전체 식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대에 그친다. 저조한 자급률은 식량안보에 대한 우려를 낳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의 세계식량안보지수 평가에 따르면 한국은 2017년 26위에서 갈수록 떨어져 2021년에는 32위를 기록했다. 식량안보를 위해 식량 자급률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큰 이유다. 하지만 식량 자급률을 올리기는 쉽지 않다. 국내산은 수입 곡물보다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국산 밀 가격은 수입 밀보다 3배나 비싸다. 이런 상황에서 자급률을 높이는 정책은 그만큼의 예산이 투입되거나 소비자 부담을 늘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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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2008년 애그플레이션(곡물 가격 상승으로 일반 물가도 오르는 현상) 당시 정부는 식량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해외 농장 매입(해외 직농)과 국제곡물조달시스템 구축을 추진했다. 해외 직농은 국내 기업들이 해외 농장을 사들여 대규모로 농작물을 재배하는 사업을 정부가 지원하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성과가 신통치 않은데다 국제 곡물 시장이 안정되면서 예산 지원 논란이 불거졌고 얼마 안 가 흐지부지됐다. 국제곡물조달시스템 구축은 카길을 비롯한 곡물 메이저들이 구축한 글로벌 곡물 유통망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식은 돈이 많이 든다. 곡물을 수입할 때 최저가 입찰 방식과 달리 정해진 가격으로 수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량 가격이 급등하더라도 안정적으로 곡물을 확보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 김종진 연구위원은 “2007년 정부 대책이 제대로 추진됐으면 지금 같은 위기 상황에서 식량 확보 걱정은 줄었을 것이다. 지금은 식량 물가가 오르는 것은 피할 수 없고, 상황이 악화되면 식량을 확보하는 게 어려워질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아직은 애그플레이션 때에 견줘 가격과 수급이 안정적이다. 세계 식량 재고율이 소비량 대비 30% 수준인데 이 정도면 과거 사례를 봤을 때 심각한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각국의 식량 확보 경쟁이 치열해지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정부는 업계 및 전문가로 구성된 국제곡물수급대책위원회를 만들고 대체 원산지 확보 등의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김종진 연구위원은 “장기적으로 식량 자급률을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올리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춘재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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