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정의당 여영국 대표가 국회 본청 앞에서 열린 ‘제대로 된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 제정 촉구대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단
지난 8월 정의당 여영국 대표가 국회 본청 앞에서 열린 ‘제대로 된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 제정 촉구대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단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4개월 앞둔 지난 8월 국토교통부가 승인한 대한건설협회 정관 개정이 뒷말을 낳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에 대비해 대표이사직을 내려놓는 건설사 경영자들을 위한 ‘맞춤형 정관 개정’을 했다는 의혹인데, 관리 책임이 있는 국토부가 협회 쪽 논리를 그대로 옹호하는 등 업계의 중대재해처벌법 회피 움직임에 ‘들러리’를 선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14일 장경태 더불어민주당 의원실(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자료와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국토부는 지난 8월13일 대한건설협회가 요청한 정관 개정안을 승인했다. 협회 정관 개정안의 핵심은 ‘회원의 권리’(제9조) 부분으로 법인 회원의 경우 권리 행사 주체를 ‘대표자’에서 ‘대표자 또는 등기이사 중 1인’으로 변경한 것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정관 개정 신청 사유 및 승인 배경에 대해 “대한건설협회에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게 각 회사 대표이사인데 이렇다보니 대표이사가 참석할 수 없는 대기업은 협회 활동이 어려우니 범위를 확대해달라는 요구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국토부의 정관 개정 승인이 떨어진 날부터 5일 뒤인 8월18일 김상수 대한건설협회장이 한림건설 대표이사직을 사임하고 일반 등기이사가 된 것으로 나타났다. 19일에는 협회 회원 이사 중 한 명인 ㅇ건설사의 최아무개 대표 역시 대표이사직에서 사임했다. 정관 개정 전이라면 대표자가 아닌 두 사람은 회원 권리를 상실하게 되지만, 정관 개정이 이뤄진 덕분에 정관 상 문제없이 협회장 신분과 협회 이사 신분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광고

협회 관계자는 김 회장이 한림건설 대표이사를 사임한 일에 대해 “고령이시다보니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협회 운영에 전념하실 계획”이라며 “정관 개정은 회원사 참여 확대 차원이지 협회장과는 무관하다”고 선을 그었다. 국토부 관계자도 “2018년에 대기업 33곳이 권리 행사 확대를 요구한 적이 있었다”며 협회와 같은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대기업 민원이 있었던 게 2018년인데 3년 뒤인 올해 갑자기 관련 정관 개정이 이뤄지는 것은 시점 상 석연치 않다. 더구나 협회 정관에는 대기업 참여 확대를 위한 조항(‘대표자가 대표권을 행사하기 곤란한 경우 당해 법인의 등기이사가 대표권을 행사하게 할 수 있으며…자격요건, 변경절차 등은 따로 규정으로 정한다’)이 2013년부터 신설돼 있었다. 국토부 관계자는 “따로 규정을 만들어야 하는 데 만들지 않아서 아예 정관으로 못박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광고
광고

장 의원실은 이같은 정관 변경이 중대재해처벌법 회피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장경태 의원은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건설업계에서 법 상 처벌 대상이 되는 ‘사업주와 경영책임자’의 범위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고, 실제 현장에서는 중대재해처벌법에 대비해 대표자를 변경하는 건설사들이 있다는 얘기가 돌고 있다”며 “중대재해처벌법 등으로 업계가 민감한 시기에 건설사 동향과 협회 관리에 신중을 기해야 할 국토부가 들러리를 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토부는 협회 정관 개정이 중대재해처벌법 회피에 악용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에 대해 “실질적인 오너를 처벌할 수 있다는 게 우리 부처 해석”이라며 “정관 개정을 승인할 때 그런 우려에 대한 검토를 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중대재해처벌법 전문가인 최정학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법학과)는 “법 제정 과정에서 전문경영인이나 실제 권한이 없는 사람을 대표이사로 내세우고 실제 경영자가 책임을 면할 수 있다는 우려는 처음부터 제기됐다”며 “부처 해석과 별개로 수사기관과 법원이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광고

내년 1월27일부터 시행되는 중대재해처벌법은 사망자 1명 이상 또는 6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가 2명 이상 발생한 경우 등을 ‘중대산업재해’로 규정하고 안전 및 보건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업주 및 경영책임자를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