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변화하는 노동시장과 사회구조를 법·제도가 따라가지 못하자 직접 안전망을 구축하려는 법인이나 단체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최근 노동계와 시민사회 등 각계에서 일어나는 공제회 설립 바람이 대표적이다. 특히 소비자들의 관심도가 높은 친환경 농식품 시장에서 시작해 조합원 140만명, 사업규모 1조4천억원(2019년 기준)으로 급성장한 소비자생활협동조합(생협)이 가장 적극적이다. 친환경 농업과 유통 산업의 대안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 생협이 공제를 통해 주식회사가 운영하는 보험상품의 대안을 제시하고, 연대로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생협은 최근 20만 국민청원과 1인시위를 시작했다. 2010년 국회가 생협법에서 공제사업을 허용했지만 현재까지 시행 방안이 마련되지 않아 사업 추진이 막혀 있는 것을 쟁점화하기 위해서다. 지난 7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서비스연맹은 배달노동자들을 위한 ‘배달공제조합’이 설립되어야 한다는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지난 8월25일 플랫폼 노동자와 프리랜서 보호를 목적으로 한 ‘한국플랫폼프리랜서노동공제회’ 발기인대회를 했다. 이 자리에서 김동만 한국플랫폼프리랜서노동공제회 이사장(전 한국노총 위원장)은 “노동법과 사회보험의 사각지대에 놓인 플랫폼 노동자와 프리랜서의 경제적 안전망을 구축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찾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한국노총중앙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음식배달, 대리운전과 같은 플랫폼 배달노동자의 업무 중 사고율은 32.5%에 이른다(전체 응답자 348명). 전년도 상해사고나 업무로 인한 질병 경험이 있는 플랫폼 배달노동자 중 63.7%는 관련 비용을 전액 본인 비용으로 부담했고, 26.6%는 개인이 가입한 상해보험으로 처리했다. 10명 중 9명이 업무상 발생한 사고 혹은 질병을 개인적으로 부담한 것이다.
복지 사각지대를 메울 수 있는 수단으로 왜 공제가 이야기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공제’는 소득공제나 세액공제처럼 감면해준다는 것이 아니라 ‘공동구제’의 의미이다. 공제는 공통의 이익 관계를 갖고 경제적 불안을 제거한다는 목적이 있다. 용어는 다소 낯설지만, 공제는 우리 주위에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예컨대 부동산 중개 사무실에서 매매나 임대차 계약을 맺을 때 계약서와 함께 ‘부동산 공제증서’도 받는다. 만약 중개인 잘못으로 부동산 사고가 발생할 경우 계약자에게 한국공인중개사협회나 보증보험 회사에서 피해 금액 보상을 보증해준다는 증서다. 모든 개업 공인중개사는 매년 공제료를 내고 있으며, 협회에서는 이를 모아 공제비용을 충당한다. 중개사의 업무상 과실로 인한 피해 발생 시 대처할 보험인 셈이다. 교직원, 경찰, 군인 등 특정 직군 대상의 공제회는 익숙하기도 하다. 정부가 소상공인의 사회안전망 제도로 중소기업중앙회에 위탁 운영하는 노란우산공제는 정책적으로 특정 계층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의 공제이다. 새마을금고, 신용협동조합, 수산업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공제의 경우 회원(조합원)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준조합원, 준회원 등의 자격으로 공제 가입이 가능하다.
공제 관련 기본법 없이 개별법 관리♣
법률적으로 공제에 대한 표준화된 정의는 없다. 공제 관련 기본법이 없기 때문이다. 보험연구원에 따르면 2019년 기준, 78개 공제조합이 17개 부처의 38개 개별법에 따라 관리되고 있다. 통상 개인들이 민법, 개별 근거법 또는 협동조합기본법 등에 따라 보험과 유사한 형태로 상호부조 목적으로 공제료를 적립하고 그 적립금 한도 내에서 공제료를 낸 회원들을 위해 사업을 하는 것으로 공제를 정의할 수 있다. 국제보험감독협회(IAIS)는 공제조합이 주식회사 주주와 유사한 권한을 갖는 △회원 소유 조직으로 △민주적 권한을 갖고 운영하며 △연대에 기초해 호혜적 결과를 추구하고 △특정한 집단과 목적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작동하며 △이익 또는 손실이 회원들에게 귀속된다는 다섯가지 특징이 있다고 본다. 공제회, 공제조합은 협동조합 형태의 보험회사인 셈이다.
보험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공제는 표면적으로 보험과 큰 차이가 없다. 공제사업은 회원을 대상으로 퇴직공제, 손해공제, 생명공제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회원의 사건·사고 발생과 같은 위험 보장을 목적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그 대가를 받는다. 특히 새마을금고, 신용협동조합, 수산업협동조합 공제는 일반인에게도 사실상 열려 있다. 일반 보험 가입이 어려운 서민층을 대상으로 공제사업을 진행하면서 민영보험의 독점을 막고 경쟁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확장해왔기 때문에 공제상품이 기존 보험상품과 유사하다. 하지만 공제조합은 조직의 소유와 의사결정 구조, 잉여금의 귀속, 지배권 행사 주체에 있어 보험회사와 큰 차이가 있다. 보험회사의 지배권은 전적으로 주주에게 있지만, 공제조합은 의사결정 구조나 잉여금의 귀속, 그리고 경제적 소유권이 모두 조합원 혹은 회원에게 있다. 공제조합은 비영리법인이기에 영리 추구가 목적이 아니라 조합원 복지 증진 등을 위한 경제활동을 수행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새마을금고는 공제사업에서 발생한 이익을 장학사업 등 공공복지 사업에 쓰거나 배당금으로 계약자들에게 환원한다. 수산업협동조합 또한 비영리사업으로 계약자를 위한 무료검진 사업, 장학금 지급 등 다양한 복지환원 사업을 시행한다. 공제를 운용하는 이들 협동조합 세곳의 공제지급률을 따져보면 평균 87.5%로 민간보험의 84.2%보다 높다. 특히 수협과 신협의 경우 각각 97.4%, 96.0%에 이른다.
해외에서 공제조합의 규모는 날로 성장하고 있다. 국제협동조합보험연합(ICMIF)이 2017년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공제조합과 협동조합 보험 시장은 2007년에 견줘 10년 사이 30%가 늘어났다. 반면, 같은 기간 보험 전체 시장은 17% 증가하는 데 그쳤다. 그 결과 공제조합과 협동조합 보험의 전세계 시장점유율은 2007년 23.8%에서 2017년 26.7%로 높아졌으며, 9억2200만명의 조합원(보험계약자)을 확보하고 있다. 무엇보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지역사회의 보건복지 및 금융지원, 일선 현장의 의료전문가 지원을 위한 기부 등 80억달러(약 9조3천억원)가 넘는 재정 지원을 투입했다. 국제협동조합보험연합 회원사인 스웨덴의 폴크삼(Folksam)과 렌스푀르세크링아르(Länsförsäkringar)사는 지난해 3억달러(약 3470억원)를 코로나로 손해를 입은 기업을 돕기 위해 국제금융공사(IFC)가 발행한 채권, 유럽 헬스케어 시스템을 지원하는 유럽투자은행(EIB) 발행 채권, 그리고 북유럽 국가의 헬스케어 시스템과 공급망 관리에 필요한 재정 지원을 돕는 북유럽투자은행(NIB)이 발행한 채권에 투자했다. 이러한 투자는 조합원이 소유한 공제조합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시민사회 스스로 보호, 공제 필요성 커져♣
조합원이 소유한 공제조합의 활발한 움직임은 국내에서도 움트고 있다. 2012년 야근을 하던 시민단체 활동가가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그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자녀가 있었지만 개인보험이나 4대보험은커녕 모아둔 돈도 없었다. 제도권이 살피지 못하는 곳곳에 도움의 손을 뻗고 있는 활동가들의 삶이 정작 생존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음을 일깨웠다. 당시 약간의 모금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민사회는 공익활동가의 안전한 삶을 보장하는 것을 넘어 시민사회단체, 협동조합, 노동조합 사이의 연대의식을 높이는 방법으로 공제조합을 만들었다. 그렇게 2013년 ‘공익활동가 사회적협동조합 동행’이 설립되었다. 동행은 현재 2천명이 넘는 조합원과 후원회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소액대출 사업은 물론 활동가 건강지원, 교육지원, 재충전지원 사업 등을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지난해 10월부터는 서울시, 노사 사회공헌기금 재단(공공상생연대기금·금융산업공익재단·사무금융우분투재단·전태일재단)과 함께 코로나19로 힘든 비영리 공익단체와 활동가들에게 특별융자 사업을 시작했다. 사회적경제 공제의 사례들이 현장에서 각자의 필요를 충족하는 방법으로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민간 보험상품이 없거나 여력이 없어 이용이 쉽지 않을 때, 또 정부 정책의 공백으로 드러난 사각지대를 공제가 해소하고 있다. 돌봄의 인프라를 아웃소싱하는 것이 아니라 인소싱하는 것, 공제를 통한 재사회화를 기대할 수 있다. 최근에는 이런 흐름을 안고 플랫폼노동자 단체 등에서도 공제회 설립 움직임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현재 복지체제는 정규직 임금근로자에 기초한 사회보험, 극빈층을 지원하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영리 중심 민간보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생애 전반에 걸쳐 직면할 수 있는 위험들, 이를테면 실직, 질병, 장애 등에 대한 국가의 보장을 기대한다. 하지만 모든 위험을 국가가 감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민간 영역에서는 사고, 화재, 수해, 건강 및 생명과 관련해 정부 정책을 보완하는 상품을 내놓는다. 시장에서 복지를 구매해야 하는 상황에서 무거운 부담을 혼자 지지 않고 여러 사람과 공동으로 부담하여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공제이다.
공제는 정부 책임의 사회보장과 개인 책임의 사적보장 중간에 위치한다. 사회보장은 기업 규모, 정규직 여부 등에 따라 기업 복지 수준이 달라지기 때문에, 실현되지 못한 복지에 대한 욕구는 다양하다. 이때 공제는 중간에서 미실현 복지 욕구에 대응할 수 있다. 새로운 노동 방식은 기존 사회보장을 통한 복지 욕구 충족이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공제는 복지 공백을 최소화하는 시스템으로 기능할 수 있다. 작은 부금으로 조합원의 생활에 필요한 보장을 스스로 만들고 상호부조의 마음을 키워가는 것, 불안정한 사회 구조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포착해 변화시켜나가는 공제의 가능성이 기대되는 때이다.
♣️H6s신효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연구원 jinnytree@hani.co.kr
참고자료
1. 최창희, 홍민지(2020), ‘공제보험 현황 조사’, 보험연구원
2. 장진희, 손정순, 이향숙(2020), ‘플랫폼노동 종사자 보호를 위한 공제회 설립방안-플랫폼노동 실태조사를 중심으로’, 한국노총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