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분씨 부부.
학분씨 부부.

강원 평창군 진부면과 정선군 북평면을 잇는 59번 국도변. 진부면 마평리 오대천 물줄기의 벼랑 위에 청심대라는 작은 정자가 있다. 강릉부사와 기생 청심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전한다.

59번 국도는 이 청심대 앞에서 마평1리 들머리 삼거리까지 'Z'자 모양의 매우 급한 굽잇길을 이룬다. 이 굽잇길 중간에, 길에 바짝 붙은 낡은 농가가 한 채 있다. 소박한 세 칸짜리 흙벽집이다. 지붕 밑에는 '오래된 유머'처럼 썰렁한 붉은 글씨의 쇠판때기가 달려 있다. '멸공방첩'.

삼거리 쪽에 차를 세워 두고 이 소박한 농가 사진을 찍고 있을 때 부엌에서 할머니가 나오셨다. 인사를 하자 할머니는 말씀 대신 웃으며 자신의 귀를 가리킨다. 그리고 두 손으로 가위표를 그려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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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도, 뒤이어 방문을 열고 나오신 할아버지도 청각장애인이었다. 트럭이 지나가며 일으키는 바람에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로워 보이는 이 흙벽집에 두 어르신 청각장애인 부부가 40여년째 살고 있었다.

사진 찍는 모습을 지켜보며 경계를 늦추지 않던 두 분은 이웃집 이혜송(51)씨가 다가와 '통역'을 자처하고 나선 뒤에야 안도하며 마음을 열었다. 이 집에서 낳고 키운 두 자녀를 결혼시키고 취직시켜 객지로 보내고, 금실 좋게 사는 이병기(70)·김학분(64)씨 부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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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두 칸, 부엌 한 칸, 헛간과 재래식 변소, 깻잎 모종을 키우는 작은 비닐집 하나를 갖춘 집에서 큰 흰둥이, 작은 검둥이 두 마리 개와 함께 살고 있다. 바람 거세면 지붕 날아갈까 걱정, 비 오면 산에서 흙더미 쏟아질까 걱정하면서도 "법 없이도 살 만한" 두 어르신은 무쇠솥 걸린 부뚜막 아궁이에 장작불을 때며 환하게 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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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이 질주하는 이씨 집 앞 도로.
차량이 질주하는 이씨 집 앞 도로.

이씨는 이 마을 토박이로 개울 건너 '따뜻한 물 나는 곳'에 살다 40여년 전 김씨와 결혼해 현재의 집으로 이사왔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이 집과 도로의 거리다. 집 한 쪽 모서리가 도로와 거의 닿아 있다. 시멘트 봉당과 아스팔트 사이의 거리는 30㎝에 불과하다. 집 앞마당에 내려서면 왼쪽은 바로 아스팔트길이다. 부엌 쪽 지붕은 길 위로 튀어나와 차량들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간다.

손짓으로 오가는 대화가, 집 앞의 위험한 도로 상황과 교통사고 이야기에 이르자 두 어르신의 손짓이 격렬해졌다.

이병기씨가 사진기 든 손을 잡아끌더니 부엌 기둥 쪽으로 데리고 갔다. 부엌과 헛간 기둥을 가리키면서 청심대 쪽에서 급회전해 달려온 차가 급정거하며 기둥을 들이받는 시늉을 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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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엔 김학분씨가 따라 오라고 손짓하더니 집 반대편 벽 쪽으로 데려갔다. 이번엔 삼거리 굽잇길에서 급회전해 들이닥친 차가 미처 핸들을 못 꺾고 집 벽을 들이받는 시늉을 해보였다. 이 낡고 빈약한 '수제 흙벽집'은 양쪽 굽잇길에서 질주해 온 차량들의 협공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었다.

두 분은 또 청심대 쪽과 삼거리 쪽을 가리키며 두 주먹을 무수히 마주 부딪쳐 보였다. 차량 충돌 사고가 잦다는 설명이다.

이혜송씨가 말했다. "여기는 아주 고질적인 교통사고 다발지역이에요. 이 삼거리에서만 올 들어서 벌써 네다섯번이나 사고가 났어요. 언제 차가 덮칠지 모르는 이런 집에서 누가 살고 싶겠어요."

다른 집으로 이사할 생각이 없냐는 물음에 두 어르신은 두 손으로 가위표를 만들어 보였다. 낡은 나무기둥과 마루를 매만지며 이씨는 고개를 흔들었다. 두 어르신의 얼굴엔 손때 묻고 정 쌓인 집을 결코 버릴 수 없다고 쓰여 있었다.

아이를 안고 나타난 이웃 김운영(42)씨가 말했다. "이 할아버지는 손재주가 아주 좋으세요. 차가 들이받아 집이 부서지면 다 혼자서 직접 고치고 갈아끼워요. 그래서 이 집이 아직도 번듯한 모습을 하고 있죠." 김씨는, 주민들이 창고나 정자, 침상 등나무로 무엇을 만들 때는 이병기씨에게 일을 맡긴다고 덧붙였다.

40여년을 한 자리에서 살아온 집주인답게 두 어르신은 집 앞에서 자주 일어나는 교통사고의 원인은 물론, 그 해결책까지도 알고 있었다.

이병기씨가 돌멩이를 집어 들고 땅바닥에 길을 그려 보이며 열심히 말씀하셨다. "이 앞의 감자밭이 문제다. 바닥이 낮았던 밭을 흙으로 메워 높이는 바람에, 굽잇길 양쪽에서 올라오고 내려오는 차량들이 서로를 볼 수가 없게 됐다."

김학분씨도 밭의 흙을 다시 파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흙을 파내면 양쪽에서 오는 차들이 훤히 보인다. 또 삼거리 길을 넓혀야 한다. 달려오던 버스나 트럭이 한번에 회전하기 어려워 사고가 자주 나는 거다."

길 건너 감자밭을 다시 파내 시야를 확보해야 사고가 줄어들 것이라고 설명하는 김학분(오른쪽)씨.
길 건너 감자밭을 다시 파내 시야를 확보해야 사고가 줄어들 것이라고 설명하는 김학분(오른쪽)씨.

전 이장 김종덕(70)씨도 해법을 내놓았다. "감자밭은 낮추고 감자밭 아래쪽 길과 다리는 높여서 다시 놓아야 한다. 그래야 교통사고도 막고 홍수 때 물난리도 막는 1석2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격렬했던 대화도 잦아들고 마을엔 슬슬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사고를 막을 근본적인 해법은 아무래도 굽은 길을 펴는 일이 될 듯했다.

차들이 굉음과 바람을 일으키며 오가는 가운데 할머니는 저녁밥을 짓기 위해 부엌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폈다. 할아버지는 개똥을 담은 수레를 비닐집 안으로 옮겼다.

두 어르신과 작별하고 차로 돌아왔다. 집 쪽을 돌아다보니 흙벽집 굴뚝에 저녁연기가 아련한데, 마당에 선 두 어르신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높이 들어 흔들어 주었다.

평창/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