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태생 지휘자 세묜 비치코프(71)가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오는 24일과 25일, 서울과 대구에서 첫 내한 공연을 펼친다.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러시아 태생 지휘자 세묜 비치코프(71)가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오는 24일과 25일, 서울과 대구에서 첫 내한 공연을 펼친다.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체코 필하모닉을 이끌고 내한하는 러시아 태생 지휘자 세묜 비치코프(71)는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됐다. 세계적 명성과 역량에 비해 국내에선 이름이 덜 알려졌다. 그래서인지 한국 공연도 처음이다. 유럽에서는 젊은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1980년대 말기 30대 시절에 이미 베를린 필하모니를 이끌던 카라얀의 후계자로 거론될 정도였다. 클라우디오 아바도, 로린 마젤, 주빈 메타, 리카르도 샤이 등 쟁쟁한 지휘자들과 함께 카라얀 후임 물망에 오르내렸다.

그는 최근 한겨레와 서면 인터뷰에서 카라얀과의 첫 대면을 “1985년 2월, 지휘자 오이겐 요훔을 대신해 베를린 필하모닉 무대에 섰을 때”라고 회고했다. 당시 서른세살 비치코프는 미국 미시간의 작은 오케스트라 그랜드래피즈심포니를 이끌고 있었다. 카라얀은 그 오케스트라가 어떤 악단인지 궁금해했다. “제게 그랜드 래피즈는 당신의 울름(Ulm)과 마찬가지입니다.” 비치코프는 카라얀에게 이렇게 답했다.

“카랴얀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정말 좋은 결정을 했군요. 몇 년만 지나면 당신은 그 어떤 것에도 준비되어있을 겁니다’라고 하더군요.” 카라얀은 독일 남서부 작은 도시 울름 시립오페라극장에서 무명 시절을 보내며 기량을 갈고닦았다. 카라얀을 세계적 지휘자로 도약하게 해준 발판이 울름 극장이었다. 카라얀은 미국의 작은 오케스트라에서 비범한 기량을 쌓은 비치코프에게서 젊은 시절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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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얀은 비치코프를 적극 후원했고, 베를린필 무대에도 세웠다. 1987년엔 베를린필과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을 녹음할 기회도 줬다. “그 시절만 해도 독일 오케스트라들은 쇼스타코비치를 자주 연주하지 않았어요. 카라얀도 교향곡 10번만 녹음했지요. 그는 “카라얀이 ‘내가 작곡가라면 쇼스타코비치 같은 음악을 작곡했을 것’이란 말도 했다”고 전했다.

2018년부터 체코 필하모닉을 이끌고 있는 지휘자 세묜 비치코프.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2018년부터 체코 필하모닉을 이끌고 있는 지휘자 세묜 비치코프.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비치코프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녔다. 21살에 라흐마니노프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했지만 유대인인 그에겐 좋은 기회가 오지 않았다. 차별을 피해 아무 연고가 없는 미국으로 이주했고 오로지 실력으로 이름을 알려 나갔다. 이후 독일과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유럽 각국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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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치, 사회 문제에서도 분명한 목소리를 낸다. “악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그 공범이 되는 거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튿날 발표한 성명에 날이 서 있다. 러시아를 비판하는 예술가 중에서도 단연 앞자리에 섰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거짓말쟁이’, ‘학살자’라고 직접 겨냥했고, 체코 필하모닉 입주 건물에 우크라이나 국기까지 내걸었다.

그가 이번 전쟁에 이토록 강하게 발언하는 데엔 사연이 있다. 레닌그라드 태생인 그의 가족사엔 전쟁의 상흔이 아로새겨져 있다. 할아버지는 2차대전에서 전사했고, 우크라이나 오데사에 살던 외가 가족들은 나치에 몰살당했다. 아버지는 전쟁으로 두 차례 부상했고, 어머니는 나치의 레닌그라드 900일 봉쇄를 겪었다. 그는 성명에 자신의 이런 내역을 소상히 밝힌 뒤, “오늘 침묵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양심과 가치, 인간 본성의 고귀함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행동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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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치코프와 체코필은 오는 24일 서울 예술의전당, 25일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드보르자크의 피아노 협주곡과 교향곡 7번을 들려준다. 체코 필하모닉은 체코 작곡가 드보르자크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1896년 이 오케스트라 창단 연주회를 드보르자크가 지휘했다. “드보르자크의 피아노 협주곡은 정말 완벽한 걸작인데, 체코를 제외하고 다른 나라에선 이상할 정도로 자주 연주되지 않는 게 이해하기 어려워요.” 그는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이 너무 유명하다 보니 피아노 협주곡으로까지는 이어지지 않는 것 같다”며 “브람스와 베토벤을 합친 듯하면서도 드보르자크의 음악적 특성을 지닌 피아노 협주곡”이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이 곡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동시에 이번이 이 작품을 듣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답니다. 뭘 하든 그 순간이 전부인 것처럼,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을 맡겨야 해요.” 그가 강조한 공연 관람 포인트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