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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음악·공연·전시

격자 타고 흐른 물감, 가까이 봐야 아름답다

등록 :2021-09-16 18:19수정 :2021-09-17 02:31

단색조 추상회화 대가 정상화 회고전
정상화 작가가 1987년 프랑스에서 작업한 작품 <무제>의 일부분. 격자 화면에 검은색, 흰색 등의 단색을 쓰는 작가의 일반적 작업 양상과 달리 다채로운 색감과 분방한 구성을 보여주는 색다른 작품이다.
정상화 작가가 1987년 프랑스에서 작업한 작품 <무제>의 일부분. 격자 화면에 검은색, 흰색 등의 단색을 쓰는 작가의 일반적 작업 양상과 달리 다채로운 색감과 분방한 구성을 보여주는 색다른 작품이다.

‘가까이서 보아야 아름답다.’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3·4전시실에 차려진 한국 단색조 추상회화의 대가 정상화(89) 작가의 회고전에서 실감나는 말이다. 떨어져서 보면 허옇거나 검고 푸른 색을 지닌 벽지들의 미로 같지만, 다가서서 화폭 표면을 눈으로 훑으면 출품작들의 매력을 짐작하게 된다. 네모진 격자의 미세한 윤곽과 격자들을 타고 흐르다 굳은 물감 자국의 질감과 잔거품이 보이고, 이런 자취들이 빚어내는 구성의 아기자기함이 와닿는다.

전시는 지금 한국의 대표 현대미술사조로 꼽히는 단색조 추상회화(모노크롬)에서 독창적 제작 기법으로 별격의 화풍을 이룬 대가의 작품들을 시기별로 모아놓았다. 1953년 그린 자화상부터 2000년대 추상 대작까지 100여점의 작품과 자료들이 나왔다.

전시에서 처음 관객에게 공개된 1953년 청년 시절 자화상.
전시에서 처음 관객에게 공개된 1953년 청년 시절 자화상.

1970년대 중반 이후 정착된 정상화의 모노크롬 그림들은 사실 그리는 것이 아니라 얕은 부조판 성격에 가깝다. 화폭에 고령토를 수없이 칠해 흙층을 형성시킨다. 그러고 나서 다시 접고 뜯어내고 갈라지게 해서 그 균열과 틈에 물감을 흘리거나 발라 메워내는 행위와, 그 행위의 연속되는 과정이 작품으로 물화된다. 복제본이나 위작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만드는 과정에 작가의 개성과 정서가 강렬하게 스며드는 것이 특징이다.

뜯어내고 메워내는 행위는 고려청자 상감기법이나 분청사기 박지기법을 연상시킨다. 1969~77년 일본에 장기 체재하며 당시 일본 화단에 유행하던 모더니즘 실험과 물성 실험의 모색기를 거쳤다는 점에서, 당시 재일 작가로 활동하며 이우환 등 한국 모더니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거장 곽인식의 작업과도 통한다. 그는 이후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작업하면서 실존주의 예술의 세례도 받으며 노동집약적이면서도 축적의 힘으로 표상되는 수행적 회화의 맥을 이어왔다. 지금 미술시장을 지배하는 박서보, 하종현 등 홍익대 교수 출신 작가들의 육감적 모노크롬 회화와는 결이 다른 작업으로 비친다.

정상화 작가의 1997년 작 &lt;무제 97-10-5&gt;.
정상화 작가의 1997년 작 <무제 97-10-5>.

하지만 전시는 이런 결의 차이, 왜 그가 오랫동안 일본과 프랑스에서 작업했는지, 실존주의와 좌파 이념이 득세했던 당대 일본과 프랑스에서 어떤 사상적·조형적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초창기 작업의 진행 과정과 작가론의 형성 과정, 작가의 습작 노트, 스케치들, 편지 등 기본 아카이빙 자료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작가의 경력과 주요 작품들을 압축해 보여주는 요약본에 가깝다.

정상화 작가의 1970년작 &lt;작품 B-12&gt;. 일본 고베에서 작업하던 시기의 작품으로, 원과 흰색면, 맨살을 드러낸 캔버스 표면 등이 어울려 있다. 그의 추상화풍이 특유의 단색조 격자 화면으로 굳어지기 전 모색기의 양상을 보여준다.
정상화 작가의 1970년작 <작품 B-12>. 일본 고베에서 작업하던 시기의 작품으로, 원과 흰색면, 맨살을 드러낸 캔버스 표면 등이 어울려 있다. 그의 추상화풍이 특유의 단색조 격자 화면으로 굳어지기 전 모색기의 양상을 보여준다.

작가의 초창기 추상그림인 1965년작 &lt;작품 65-B&gt;. 형체 없이 격정이나 뜨거운 감정을 화면에 표출하는 서구 앵포르멜 사조의 영향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작가의 초창기 추상그림인 1965년작 <작품 65-B>. 형체 없이 격정이나 뜨거운 감정을 화면에 표출하는 서구 앵포르멜 사조의 영향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전시장은 작가의 격자형(그리드) 작품 얼개의 개념을 본떠 여러개의 가벽을 세워 공간을 격자형으로 구획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멋을 내며 조성한 가벽은 전시 내용과 조응하기는커녕 관람을 혼란스럽게 한다. 초창기와 중기의 작가 행적과 작품을 다룬 3전시실의 1~3부 영역 전시가 순차적으로 이어지다가 통로를 지나 4전시실로 접어들면 갑자기 동선이 엉키게 된다. 92년 귀국 뒤부터 지금까지 근작을 소개하는 마지막 4섹션 ‘모노크롬을 넘어서’ 전시장이 갑자기 4전시실 들머리에 등장하는 것이 그렇다. 4섹션 공간을 지나가야 그 이전 시기 작품들을 다룬 섹션이 나타난다. 말년기 작업을 구경했다가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그의 구작을 보고 다시 말년기 작업으로 돌아오는 수고를 해야 하는 셈이다. 동선에 대한 배려와 전시 연출에 대한 고민이 충실하지 않다는 점이 아쉽다. 26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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