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승우’, ‘믿보배’, ‘이름이 장르’….
배우 조승우. 그에게 따라붙는 각종 수식어를 면전에서 읊어줬을 때, 그는 입고 있던 빨간색 점퍼보다 더 붉게 얼굴을 물들이며 연신 마른세수를 했다. 약 5초간의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그가 모기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어쩌죠? 저 스스로에 대해 박한 편이에요. 늘 그래 왔어요.” 의외의 반응에 놀라 ‘과도한 겸손은 교만 아니냐’고 다소 공격적으로 되묻자 “과분한 칭찬이 돌아올 때 몸 둘 바를 모르겠고 도망가고 싶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물론 너무 좋다. 하지만 칭찬을 받으면 그다음 내디딜 걸음에 대한 부담감이 너무 크다”고 했다.
드라마·영화·뮤지컬 등 모든 장르를 종횡무진하며 데뷔 이후 18년 내내 ‘최고의 자리’를 지켜온 조승우(38)가 인터뷰 첫머리 ‘연기부담’에 대해 토로하다니…. “조승우, 난 연기 잘 못 해”를 연예인 망언목록에 추가하며, 이 정도면 ”정우성, 내 외모 평범하다고 생각해”와 망언 순위 1~2위를 다투지 않을까 잠시 생각해봤더랬다. 하지만 이어진 부연설명에 그의 반응이 한 50% 정도는 이해됐다. “영화 <말아톤>에서 정말 센 캐릭터를 맡았잖아요? 그다음 작품인 <도마뱀>에서 자연스러운 역할을 연기하니, 관객들이 성에 안 찬다는 반응을 보이더라고요. 드라마 <비밀의 숲>이나 <라이프>에 견줘 임팩트가 적은 이번 <명당> 속 ‘지관 박재상’ 역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느끼시는 듯해요.”
<한겨레> 문화부가 ‘독자들이 추석에 가장 만나고 싶어할 유명인 리스트’를 작성할 때, 조승우는 단연 리스트의 첫머리에 자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얼마 전 드라마 <라이프>를 호평 속에 마무리한 데 이어 추석영화 <명당>을 개봉했고, 오는 11월부터는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로 무대에 복귀한다. TV를 틀어도, 버스나 지하철 광고판을 봐도, 영화관 근처만 가도 ‘조승우 천하’다. 그래서 <한겨레>가 <명당> 개봉을 즈음해 배우 조승우를 관객 대신 만났다.
영화 <명당>은 <관상>, <궁합>에 이은 역학 3부작의 마지막 편이다. 땅의 기운이 인간의 운명을 바꾼다고 믿는 천재 지관 박재상(조승우)과 천하명당을 차지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려는 이들의 암투를 그린다. 왕이 날 터로 부친의 묘를 이장했다고 알려진 흥선대원군(지성)의 일화에 살을 붙였다. 100%의 실화도, 100%의 허구도 아닌 두 가지를 교묘히 직조해 낸 ‘실화 기반 사극’인 셈이다.
임권택 감독의 정통사극 <춘향뎐>(2000)으로 데뷔를 한 조승우이기에 <명당>은 그리 낯설거나 어려운 작품은 아니었을 터다. “드라마 <마의> 이후 5년 동안 사극 제의가 안 들어와서 못 한 것일 뿐 사극 자체가 부담스러웠던 건 아녜요. 연기는 다 어렵지, 사극이 더 어렵다고는 생각 안 해요. 오히려 사극이나 시대극에 끌리는 편이에요. 요즘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가 고갈돼 정형화된 시나리오나 대본이 많이 나온다고들 하는데, 과거 역사는 이런 풍토에 숨통을 틔워줄 수 있는 방편이 되지 않을까요?” 그는 <명당>을 찍으면서도 흥선대원군을 둘러싼 역사적 사실과 야사의 기록 등을 새록새록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졌다고 했다. “<명당>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퓨전 사극이라기보단 오히려 정통사극의 느낌이 강했어요. 클래식하고 정적이고, 우아하다는 느낌도 들어서 출연을 결정했어요.”
사실 역할로만 보면 조승우가 맡은 지관 박재상보다는 지성이 연기한 젊은 흥선이 좀 더 입체적인 캐릭터라 할 수 있다. 한 편에서는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의 무게 중심이 흥선 쪽으로 쏠리는 것 아니냐는 평가도 나온다. “연기는 흐름이고 합이라고 생각해요. 상대 배우가 없으면 저도 없는 거죠. 박재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균형감 있게 축을 받쳐줘야 하는 캐릭터라 좀 어려운 역할이긴 했어요. 너무 과해도, 너무 약해도 안 되는 에너지를 조절하느라 애를 많이 썼죠.”
자기 자신에겐 심하다 싶을 정도로 박한 조승우건만, 지성에 대해서는 5분 넘게 칭찬세례를 퍼부었다. “지성이 형은 연기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에요. 대기 시간조차 허투루 보내지 않죠. 내일이 없는 것처럼 오늘 연기에 모든 걸 쏟아붓더라고요. 많은 배우와 함께했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이에요.” 너무 긴 칭찬에 말을 자르며 ‘조승우도 훌륭하다’고 했더니 펄쩍 뛴다. “전 게으른 편이라 감독님이 한 번 더 가자고 하면 ‘아이, 뭘 또 찍어?’라며 귀찮아해요. 하하하. 반면 형은 불평불만도 없고, 평소 체력 관리도 완벽하게 해서 힘든 티도 안 나더라고요.” 지성은 결혼해서 생활이 안정되니 체력도 좋아진 거라며 결혼을 하라고 부추겼더니 빙그레 웃기만 한다.
이번 추석, 조승우는 손예진의 <협상>, 조인성의 <안시성>과 맞붙는다. 공교롭게도 풋풋한 시절 <클래식>의 흥행을 이끌었던 주연배우 3인방이 15년의 시차를 두고 경쟁자로 만났다. “한 편이 월등히 잘 돼 어떤 작품을 밀어내는 것보다는 두루두루 잘 됐으면 해요.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추석영화 네 편의 손익분기점을 합하면 1500만이고 추석 관객규모는 1300만이라 ‘피 터지는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 아니냐고 물으니 깜짝 놀라며 순진한 답변을 내놓는다. “그래요? 처음 들어요. 제가 영화시장을 너무 모르나 봐요. 관객들이 한 편만 보지 마시고 두 편, 세 편씩 보시면 안 될까요?”
그는 2년 만에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로 무대에도 복귀한다. 뮤지컬 배우 조승우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스물다섯 살 때 첫 섭외가 들어왔죠. 못 한다고 도망 다녔는데, 세 번을 쫓아와 하자고 하길래 미친 척하고 응했어요. 결과적으로 참 많은 분에게 사랑을 받은 작품이 됐죠. 제겐 자신감을 줬고, 두려움을 버리게 했고, 더불어 혹사 당해 건강도 해치게 만든 작품이죠. 하하하. 저와 <지킬 앤 하이드>는 서로를 성장시킨 관계라는 표현이 맞겠어요.” 애정이 넘치는 작품이건만 걱정도 앞선다고 했다. “스물다섯에 시작한 작품을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또 하는데, 민폐가 아닐까요? 관객들이 지겨워하진 않을까요? 후배들이 ‘저 형은 언제까지 할 거야? 욕심도 많네!”하지 않을까요?” 아직 조승우의 지킬을 보지 못해 아쉬운 관객도 많다니 “체력이 닿는 데까지 해서 그 아쉬움을 달래줘야겠다”며 팬을 향한 서비스 정신을 불태웠다.
너무 쉴 틈 없이 활약한다. 삶의 쉼표가 필요하진 않을까? “1월에 <명당> 촬영 끝내고 한 3개월 쉬었어요. <라이프> 사전 제작이 7월에 끝나 <명당> 개봉까지 또 2개월 쉬었고요. 틈틈이 쉬고 있어요. 쉬는 때의 저는 ‘이구아나’ 같아요. 가만히 집에만 있는 집돌이거든요. 반려견·반려묘랑 놀고, 야구 시즌엔 야구도 보고…. 요즘엔 <쇼 미 더 머니> 열혈 시청 중입니다.” 대체 연애는 언제 하고, 결혼은 언제 하나? 이번 추석에 <명당>으로 가족 관객 공략한다면서 정작 본인은 또 혼자일 텐데. “무대 인사 다니겠죠. 남들 놀 때 일하는 직업이잖아요. 결혼요? 기자님, 자꾸 저한테 왜 이러세요? 기-승-전-결혼? 하하하.” 별다른 스캔들도 없는 조승우의 과거를 떠올리며 ‘이 남자, 초식남 대열에 합류하는 것 아닐까?’ 살짝 걱정돼 그런 거다. 괜히 오해할까 봐 뱀발을 붙였다. 결혼 9년 차인데 해보니 좋더라고….
조승우도 이제 마흔이 코 앞이다. 나이 앞자리가 바뀌면 싱숭생숭한 법. 조승우는 어떨까? “아무래도 젊은 팬이 좀 줄어들겠죠? 하하하. 사실 제가 빠른 80년생이라 친구들은 이미 다 마흔이에요. 지켜보니 특별할 것 없던데요? 제가 서른을 무척 기다렸는데, 서른살에 군대에 있었어요.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마흔도 별거 없겠죠. 뭐.” 참 무던하고 덤덤한 조승우다운 답변이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