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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문화일반

“모두 친구이기에 ‘좌우합작’ 50년미술협회 꾸렸으나...”

등록 :2017-07-20 00:28수정 :2018-01-08 10:20

【길을 찾아서】 (27) 해방공간 서울 미술계와 좌우익 대결

1947년 월남한 김병기는 극심한 이념 대립과 이승만정권의 ‘멸공정책’으로 위기에 몰린 좌익 미술인 친구들을 구하고자 애썼다. 제1공화국 첫 문화기구였던 한국문화연구소에서 선전국장으로 일하며 1950년 1월초 좌우합작 조직인 ‘50년미술협회’ 결성을 주도했다. 협회는 당대 좌우 대표 미술인 50여명을 망라했으나 7월 창립전 직전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아쉽게도 사진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조선미술건설본부 주최로 50년 10월20~24일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해방기념문화대축전 미술전람회’는 고희동 위원장, 정현웅 서기장 등 해방 직후 좌우 함께 했던 드문 사례다. 원주와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던 이중섭(타원)도 참여했다. 제주이중섭갤러리 제공
1947년 월남한 김병기는 극심한 이념 대립과 이승만정권의 ‘멸공정책’으로 위기에 몰린 좌익 미술인 친구들을 구하고자 애썼다. 제1공화국 첫 문화기구였던 한국문화연구소에서 선전국장으로 일하며 1950년 1월초 좌우합작 조직인 ‘50년미술협회’ 결성을 주도했다. 협회는 당대 좌우 대표 미술인 50여명을 망라했으나 7월 창립전 직전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아쉽게도 사진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조선미술건설본부 주최로 50년 10월20~24일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해방기념문화대축전 미술전람회’는 고희동 위원장, 정현웅 서기장 등 해방 직후 좌우 함께 했던 드문 사례다. 원주와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던 이중섭(타원)도 참여했다. 제주이중섭갤러리 제공

-1947년 월남한 뒤 서울 정착은 어떻게 했는가?

“해주의 솟을대문 한옥에서 살다 1947년 서울 서모의 ‘불상사’ 소식을 듣고 즉각 월남했다. 생활 근거지였던 평양과 달리 서울에서 정착하려니 어려움이 많았다. 우선 갈월동에 거처를 마련하고 생활전선에 나섰다. 다행히 대방동에 있던 서울공업고등학교의 교사 자리를 얻었다. 재학생 수천명에 교사만 해도 250명가량이나 되는 대규모 학교였다. 하지만 직장이 아니라 싸움터였다. 출근만 하면 교사들은 이데올로기의 좌우익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싸웠다. 특히 막 월남한 나로서는 매우 착잡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몇개월 뒤 도상봉 선생의 추천으로 숙명여대 강사가 됐다. 더불어 한국문화연구소에서 활동했다.”

-한국문화연구소는 무엇을 하던 곳인가?

“1948년 무렵 좌우익 대결의 환경 속에서 만든 이승만 계열의 유일한 문화기구였다. 신성모 국방부 장관과 그의 아들 신명구 대위가 참여한 기관이다. 을지로 입구 문예빌딩 5층에 사무실이 있었다. 소장은 해방 때까지 <모던 일본>을 발행했던 동화작가 마해송이 맡았지만, 실세는 소장대리 신 대위(국방부 정훈국 서울분실장)였다. 나는 연구소 이사였던 장발과 김환기의 추천을 받았다. 장면의 동생 장발은 좌익을 비판하는 쪽이었고, 김환기는 좌우익 양쪽으로부터 호감을 받고 있었다. 이들은 내가 평양에서 미술동맹 서기장을 지낸 경력을 주목했던 것 같다. 연구소의 주요 업무는 대북 선무활동이었다. 부서는 문예 담당(민영식), 음악 담당 등 몇 개가 있었고, 나는 선전국장의 소임을 맡았다. 선전국의 업무는 한마디로 ‘우익 최고’를 홍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해 정동의 서울중앙방송국(KBS)에서 살다시피 했다. 평양으로 보내는 방송에서, ‘남으로 오라’ ‘우리 품으로 오라’, 이런 내용을 많이 보냈다. 물론 선무활동 외에 시낭송 같은 문예 프로그램도 넣었다. 북한 장교가 월남하면 서울시청 앞에서 카퍼레이드와 환영대회를 열어주고 연설을 시키기도 했다. 시대가 그래서 그런지 창작 이외의 일을 더 많이 해야 했다.”

1949년 12월 한국문화연구소 주최로 시민관에서 열린 종합예술제 폐막 보도기사.
1949년 12월 한국문화연구소 주최로 시민관에서 열린 종합예술제 폐막 보도기사.
1949년 12월 한국문화연구소 주최 ‘종합예술제 성황’ 보도가 눈길을 끈다. 전향 예술가가 이북 예술가에게 ‘자유를 찾아 오라’고 ‘충고’하는 내용이다. 정지용 시인이 이태준 소설가에게 보낸 글은 이렇다. “일제 질곡을 벗어난 8·15 이후 자네가 꼭 좌익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면, 좌익은 어디서 못 하겠기에 좌익 지대에 가서 좌익 노릇을 하는 게 맞는단 말인가. 이왕이면 멀리 모스크바에 남아서 좌익은 아니 되던가? 자네 좌익을 내 믿기 어렵거니와 자네 친소(親蘇) 기행문 때문에 민족문학의 좌우 파쟁이 참담해진 책임은 져야 하네. 삼팔선이 장벽이 아니라 자네의 월북이 바로 분열이 되고 말았네.” 김만형 화가가 길진섭 화가에게. “미술계를 위해 군과 손잡을 대가는 무엇이던가? 오직 기만당했다는 분개뿐이다. 대한민국엔 철의 장막도 없고 속박도 없으며 모든 문화인들은 자유롭게 각자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자유가 그립지 않은가. 북한 괴뢰집단의 모략과 기만을 군도 넉넉히 짐작했을 터인즉 군 자신의 진실로 돌아가 자유의 나라 대한민국으로 다시 돌아오라.” 김기림 시인이 이원조 소설가(이육사의 동생)에게. “예천(이원조의 호)은 일찍부터 월북하였고, 거기서 느낀 것도 많을 거요. 자유정신을 말살당하고 한개의 이데올로기나 정권에 속물로 이용당하는 데서 무슨 훌륭한 문화나 예술이 자라날 수 있을 것이오. 자유의 나라 대한민국으로 빨리 돌아와 함께 손잡고 일할 생각은 없오?”(<동아일보> 1949년 12월6일치)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든다. 정지용·김만형·김기림 역시 훗날 월북작가 명단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한 치 앞조차 내다볼 수 없는 분단 상황의 혼란한 시국이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북에서 만난 이들이 서로 무슨 말을 했을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1947년 월남 직후 서울공고 교사로
“학교가 아니라 좌우대립 싸움터”

숙대 강의하며 한국문화연구소 활동
장발·김환기 추천으로 선전국장 맡아
신성모 ‘국방’ 아들 신명구 대위 ‘실세’

1949년말 연구소 주최 ‘종합예술제’
‘전향’ 정지용·김만형·김기림 등 나서
‘자유를 찾아 오라’ 이북예술가 ‘충고’

‘멸공’ 이승만정권 보도연맹 등 탄압
“좌익미술가들 잃으면 큰 손실” 설득
1950년 1월5일 50년미술협회 결성
이쾌대·남관·김환기 공동대표로 추대

50년 7월1일 창립전 공모에 대성황
“6일 앞둔 6월25일 남대문에 인민군 탱크”

1950년 1월5일 김병기 주도로 조직된 50년미술협회 결성식을 전한 <동아일보> 기사. 국민보도연맹의 ‘국민예술제전’ 기사도 나란히 소개했다.
1950년 1월5일 김병기 주도로 조직된 50년미술협회 결성식을 전한 <동아일보> 기사. 국민보도연맹의 ‘국민예술제전’ 기사도 나란히 소개했다.

‘50년미술협회’ 결성 관련 기사도 잇따라 등장한다.(<동아일보> 1950년 1월4일) ‘과거 소그룹이 분산적으로 할거하고 있던 미술단체가 발전적으로 해산하고 중견화가들이 대동단결하여 민족미술을 앙양하기 위해 50년미술협회를 5일 하오 1시 미국문화연구소에서 결성한다’는 내용이다. 기사에는 준비위원과 추천회원 명단도 모두 망라했다. 이어 50년미술협회의 결성식 기사에서는 대표위원 15명의 명단과 함께 ‘선언문’도 소개했다. ‘현실과 민족정신이 용솟음치는 예술을 창작함으로써 찬란한 미술전통을 이 땅에 수립하는 동시에 바야흐로 세계사의 중심에서 후기 20세기의 커다란 문을 여는 미술인으로 하여금 이날에 스스로의 생명의 실존을 비약시켜 온갖 정신의 암살 침윤을 물리치고 새 세기에 전진코자 하는 새 미술이념에의 행동인이 되는 것은 50년미술협회의 역사적 사명이다. 우리는 보수적 아카데미즘을 시정하여 공산주의 미술이념과 투쟁하며 민족정신에 뿌리 박은 미술 창조에 성실노력한다.”(<동아일보> 1950년 1월9일치)

-50년미술협회는 어떤 조직인가?

“1949년 가을께부터 50년미술협회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한 세기의 마디를 계기로 새롭게 출발하자는 뜻에서 내가 직접 ‘오십년’ 이름을 지었다. 분단 상황에서 내가 한 일 가운데 가장 착한 일 혹은 가장 보람 있는 일이라고 자평하고 싶다. 이 단체는 한마디로 서울의 좌익 예술가들을 월북하거나 잠적하게 할 수 없어 조직한 것이다. 맨 먼저 우익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서울대 미대 장발 학장을 찾아가 의논했다. 그는 내 계획을 듣더니, ‘좌익 가지고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그랬다. 그는 아방가르드 예술조차 좌익으로 보려 했고, 또 유능하면 다 좌익으로 여길 정도였다. 그래서 좌우익 반반씩 섞어 단체를 만들겠다고 안심시켰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좌익 예술가들을 모두 잃을 수밖에 없고, 이는 커다란 민족적 손실이라고 강조했다. 나는 평양 선배인 검찰 간부 이태희에게도 협조를 구했다. 또 공보처 등 유력 기관이나 인사들의 협조를 얻어 드디어 50년미술협회를 결성할 수 있었다.

50년미술협회 3인 공동대표위원 가운데 우익쪽 김환기.
50년미술협회 3인 공동대표위원 가운데 우익쪽 김환기.
1948년 작품 ‘해방고지’ 앞에 선 이쾌대.
1948년 작품 ‘해방고지’ 앞에 선 이쾌대.

일본에서 자라 해방직후 귀국한 남관.
일본에서 자라 해방직후 귀국한 남관.

공동 대표위원으로 김환기·이쾌대·남관 등 3인을 추대했다. 김환기와 이쾌대는 나하고 대화가 통하는 친구 사이였다. 하기야 내가 북에서 내려와 제일 먼저 손잡은 작가가 이쾌대였다. 하지만 이쾌대는 좌익으로 알려져 있어, 그를 참여시키기 위해 김환기와 쌍두마차 체제를 구성했다. 거기다 우익 쪽인 김환기의 입지를 보강하고 좌익 부분을 희석하기 위해 남관을 추가시켰다. 일본에서 막 돌아온 남관은 사실 한국인인지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실무를 챙기기 위해 사무국장을 맡았다. 그리고 위원 15명으로 조직했다. 우익계열은 유영국, 권옥연, 장욱진, 김영주, 진환, 조병덕, 송혜수, 손응성, 이봉상 등을, 그리고 좌익계열은 최재덕, 김만형, 서강헌 등을 참여시켰다. 추천회원은 박성환, 박성규, 김순배, 김창덕, 김훈, 이규호, 조병현, 신홍휴, 유경채, 정현웅, 박상옥, 김학수, 문신, 이종무, 조병덕, 임완규, 안기풍, 이봉상, 홍일표, 엄도만, 임군홍, 이규상 등이었다. 창립전 공모 때는 약 50명의 회원이 모여 커다란 조직이 되었다.

1941년 6월 화신 갤러리에서 도쿄 태평양미술학교 동인전 기념사진에 조병덕(뒷줄 오른쪽 둘째), 최재덕(뒷줄 왼쪽 둘째), 손응성(앞줄 왼쪽 둘째) 등도 50년미술협회에 참여했다.
1941년 6월 화신 갤러리에서 도쿄 태평양미술학교 동인전 기념사진에 조병덕(뒷줄 오른쪽 둘째), 최재덕(뒷줄 왼쪽 둘째), 손응성(앞줄 왼쪽 둘째) 등도 50년미술협회에 참여했다.

협회 회원 가운데 생각나는 작가는 김만형, 서강헌, 최재덕 등이다. 개성 출신 김만형과는 고구려 고분벽화 답사와 연구를 함께 한 경험이 있다. 그의 대표작은 <십일면 관음보살상>이다. 스페인 미술을 연구한 스다 구니타로 계열의 화풍이 연상되는 작품이다. 서강헌은 제국미술학교 출신으로 좌익운동을 활발히 했지만 사실 그의 그림을 본 적은 없다. 그는 이쾌대 계열의 인물이었다. 한번은 좌익활동을 하다 중부경찰서로 끌려간 서강헌을 구출해준 적도 있다. 내가 책임지겠다고 다짐하고 전기고문 받던 그를 경찰서에서 꺼내 왔다. 최재덕은 나에게 미술동맹의 서기장까지 지냈으면서 북을 버리고 월남했다고 비판했다. 심지어 나와 차 마시기조차 거부할 정도였다. 그런 좌우익 대립 환경에서, 나는 50년미술협회를 이끌었다. 국민보도연맹 등 이승만 정권의 좌익소탕작전은 날로 격렬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친구’ 좌익 미술가들을 무조건 역사의 뒤안길로 버릴 수는 없었다.

1950년 7월1일 경복궁미술관에서 열린 예정이던 50년미술협회의 창립 공모전 안내 기사. 하지만 전시회는 한국전쟁 발발로 무산되고 만다.
1950년 7월1일 경복궁미술관에서 열린 예정이던 50년미술협회의 창립 공모전 안내 기사. 하지만 전시회는 한국전쟁 발발로 무산되고 만다.
1950년 7월1일. 그날은 50년미술협회의 창립전 개막일이었다. 경복궁미술관을 빌렸을 만큼 나의 활동력이 돋보이던 시절이었다. 협회는 전시 준비로 분주했다. 이세득 같은 화가는 뒤늦게 찾아와, 자신을 참가시키지 않았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50년미술협회 공모전, 미술계의 유일한 좌우합작 행사였다. 그러나 전시는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개막 6일 전, 곳곳에 포스터가 나부끼는 상황에서 6·25가 터졌기 때문이다. 그 무렵 나는 전시 출품작 제작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내에서 폭격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남대문에 인민군 탱크가 들어왔다.”

1950년 6월28일 서울을 점령한 북한 인민군의 탱크 행렬이 남대문 방향으로 진군하고 있다.
1950년 6월28일 서울을 점령한 북한 인민군의 탱크 행렬이 남대문 방향으로 진군하고 있다.
좌익을 구하려고 노력한 덕분이었을까, 나는 전쟁통에 구사일생의 행운을 여러 차례 겪었다. 하기야 나는 선무방송에서도 평양정권을 공격한 일은 없었다. 이는 평양에서 공산주의 체제를 먼저 경험해 그 생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사회주의 모순보다 더 큰 문제는 인권 문제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우리에게 적은 둘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권력 독점의 사회주의(전체주의)이고, 또 하나는 부의 평등을 깨는 자본주의이다. 그래서 나는 행동적 휴머니스트의 노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직전 이승만 정권은 극우반공체제를 수립하면서 좌익 통제의 목적으로 국민보도연맹을 만들었다. 이 조직은 남로당의 멸족 정책을 비롯하여 반공사상의 선전과 좌익세력의 전향 등을 기도했다. 1949년 11월 남로당 산하의 문학가들에 대한 전향 정책에 따라 시인 정지용은 자진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그처럼 전향한 문화예술계 인사가 약 4만명에 이른다는 기사도 있다.(<동아일보> 1949년 12월2일치) 하지만 미술인 가운데 전향자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보도연맹의 국민예술제전에서 메시지를 읽은 정현웅·이쾌대·김용환, 그리고 자수기간에 나온 최재덕·정종여·김만형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전향 미술가들은 매주 반공 포스터를 그려 거리 전시회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심지어 김만형은 종합예술제에서 ‘이북 문화인에 경고-길진섭 군에게’라는 경고장을 읽기도 했다. 과연 본인이 썼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과격한 내용을 담고 있다. 남북 대결은 날로 격해져 갔다. 그러다가 6·25가 발발하자 보도연맹 가입자들은 무차별 검속 및 즉결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이승만의 반공문화 정책은 월북 작가를 양산했다. 6·25 이전 월북한 미술가는 한상익, 임홍은, 강호, 김정수, 조규봉, 김주경, 이여성, 길진섭, 이갑기 등이었다. 물론 전쟁을 거치면서 더 많은 미술가들이 북을 선택했다. 김만형, 김용준, 박문원, 배운성, 이국전, 이석호, 정종여, 정현웅, 최재덕, 윤자선, 기웅, 박승구, 이팔찬 그리고 의용군으로 입대한 김진항, 윤형렬, 이병효, 채남인, 한상진 등이 있다. 뒤에 이쾌대, 이건영 등 모두 60명가량이나 된다. 월북 미술가로 인한 공백은 남쪽의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김병기의 50년미술협회 불발이 새삼 아쉬운 이유다.

녹취·집필/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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