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출판계에서 단연 많이 나오는 책은 외국 소설, 특히 일본 소설입니다. 그중에서도 추리와 미스터리, 스릴러 같은 장르문학들이 대세입니다. 2~3년 전에 견주면 거의 ‘쏟아져 나오는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근래에 나온 일본 추리소설들 가운데 출판계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책으로 <살육에 이르는 병>(아비코 다케마루 지음·시공사 펴냄)을 꼽을 수 있습니다. 나온 지 1년 만에 8천부 넘게 팔려 1만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대단한 히트는 아니어도 소설 베스트 순위에 오를 정도로 ‘선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이 출판계 관계자들을 진짜 놀라게 한 점은 따로 있습니다. 출판사 쪽에서 먼저 ‘19세 미만 구독불가’(이하 19금) 책으로 간행물윤리위원회에 자진 신고한 책인데도 예상을 깨고 잘 팔렸기 때문입니다.
<살육에 이르는 병>은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인 연쇄살인범의 이야기입니다. 내용상 당연히 범행수법을 묘사해야 하는데, 그 수위가 상당합니다. 이를 우려한 출판사는 알아서 먼저 ‘19금’ 판정을 받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무척 드문 경우입니다. 잔인함의 강도가 비슷한 다른 소설들 가운데 상당수가 19금 판정을 받지 않았고, 우선 책을 펴낸 뒤 판정을 받아도 되는데 출판사가 자청한 것입니다.
출판사들이 19금 판정을 꺼리는 이유는 판매에 거의 치명상을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19금 책은 표지에 큼직하게 ‘19세 미만 구독불가’란 스티커를 붙여야 하고, 독자들이 책을 살펴볼 수도 없게 비닐 포장을 해야 합니다. 인터넷 서점에서도 검색이 안 됩니다. 성인 인증 로그인을 해야만 검색이 됩니다. 일반 서점들은 아예 매대에 올려놓지도 않습니다. 다른 책들도 많은데 제한적으로 팔아야 하는 책을 굳이 전시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점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인터넷에서 검색도 잘 안 되는데도 <살육에 이르는 병>은 신문광고까지 동원하는 다른 소설들보다도 잘 팔렸습니다. 그 이유는 오로지 ‘입소문의 힘’이었습니다.
다른 책들과 달리 장르소설, 특히 추리나 공포문학 등은 마니아들의 평판이 중요한 영향을 끼칩니다. 출판사에서 19금을 자진 신청했다는 이야기가 마니아들 사이에 빠르게 퍼지면서 오히려 ‘얼마나 잔인하기에?’라는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입니다.
또한 추리문학 팬들은 인터넷 동호회 등이 특히 발달해 있어 정보교환이 활발합니다.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일찌감치 이 책이 일본에서 좋은 평을 얻었다는 소식이 출간 전부터 공유되고 있었습니다. 책이 나온 뒤 마니아들이 앞장서서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 호평을 남기며 판매를 주도했습니다.
<살육에 이르는 병>의 히트는 장르문학 마니아들의 독특한 기질 등을 보여주는 동시에 입소문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장면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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