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녘 장보따리 거두는 심정으로 책을 꾸몄습니다. 내년이면 나이 일흔인데, 소설을 더 욕심 낼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보니까 부끄럽습니다. 제 몸에 대해서도 부끄럽고 이웃에 대해서도 부끄럽고요.”
이청준씨가 새 소설집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열림원)를 내고 27일 낮 서울 인사동의 한 찻집에서 기자들과 만났다. <꽃 지고 강물 흘러>에 이어 3년 만에 나온 새 소설집에는 표제작을 비롯한 중편 셋과 단편 넷, 그리고 ‘에세이 소설’ 네 편이 묶였다.
“이렇게 책을 묶어 놓고 보니, 작가로서 제가 죽어라 하고 매달려 온 주제가 보이는 것 같아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념이나 이데올로기의 문제라 할 수 있겠죠. 나라가 무엇이고 백성이 무엇인지, 백성에게 나라란 무엇인지가 제 문학의 주제였던 것 같아요. 거기서 더 가면 신화가 되겠죠. 신화란 영혼의 형식이고 이데올로기의 심화된 형태라 하겠는데, 저는 거기까지는 가지 못했어요. 후배 작가들이 신화와 영혼의 차원을 좀 더 파고들었으면 합니다.”
표제작은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고국을 방문한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이야기를 다룬다. 온 국민이 월드컵에 매달리는 모습이 그의 눈에는 곱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그는 그런 조국을 잊기 위해, 이제까지 자신의 삶을 용서하기 위해 조국을 다시 떠나기로 한다. 중편 <지하실>은 전쟁 때 지하실에 숨었다가 삶과 죽음이 갈린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나라와 백성, 이념과 목숨이라는 이청준 소설의 영원한 화두를 더듬은 작품이고, 최근작인 중편 <이상한 선물>은 유년기의 고향 사람들을 신화적 풍모로 되살려낸 소설이다.
이번 책에는 작가 서문과 해설 외에도 평론가 김윤식(서울대 명예교수)씨의 ‘아, 이청준’이라는 발문이 붙어 있다. 이 글에서 김 교수는 “하늘과 땅이 하도 아득하여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제일 먼저 보고 싶은 것의 하나가 이청준씨 소설이오”라고 썼다. 1965년 <사상계>에 단편 <퇴원>이 당선되어 등단한 이후 작가로서 그가 거둔 소출은 지난 2003년 모두 25권의 ‘이청준 문학전집’으로 갈무리되었다. 그 뒤에도 작가는 장편 <신화를 삼킨 섬>과 소설집 <목수의 집> 등 네 권의 책을 더 내놓았고, 이번 소설집은 전집 이후 다섯 권째 책이다.
작가는 지금 폐암으로 투병중이다. 대학 입학 이후 피워 온 담배가 탈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요즘 주변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담배를 끊으라’는 조언을 잊지 않는다.
“병이란 게 벌 받는 거잖아요. 한번 걸려들었다 하면 담배 끊을 때의 고충보다 수백 수천 배 더한 고통을 겪는 게 바로 이 병입니다.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굉장히 힘들어요. 이를테면 지금 자기가 겪고 있는 걸 다른 사람들한테 표현도 함부로 못하게 되는 겁니다.”
작가는 요즘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감사의 기도부터 드린다.
“일용할 건강이 오늘도 허락됐구나 하는 감사죠. 그리고는 될 수 있으면 기분이 가라앉지 않도록 애씁니다. 비슷하게 병으로 고생하는 친구는 ‘우리가 직업이 소설가라서 이런 고생을 하는 모양’이라고 하지만, 저로서는 지내 놓고 보니 소설가가 좋은 직업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힘들기는 했지요. 가능하다면 다시 책을 내고 이런 자리(기자간담회)를 한번 더 했으면 하는 바람, 아니 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