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어른을 쩔쩔 매게 할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은 아이들이 가진 특권의 하나다. 여섯 살짜리가 “엄마, 불은 왜 뜨거워?”라고 물으면 엄마는 쩔쩔 맨다. “뜨거우니까 뜨겁지”라고 말하는 것은 대답이 아니란 걸 엄마는 안다. “얘는, 안 뜨거운 불도 있니?”라며 슬쩍 역공을 시도해보아도 마음은 개운치 않다. 그건 곤경을 면하기 위한 궁여지책이고 잔꾀일 뿐 대답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라고 말했다가는 엄마의 권위가 말이 아니다. “너 그런 쓸데없는 거 물어볼래?”라고 야단치는 것은 그 결과가 너무도 파괴적이다. 야단맞은 아이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시무룩해진다. 이 ‘시무룩’이 자꾸 쌓이면 아이는 질문하기 전에 망설이고 눈치보고, 그러다가 질문을 상실한다.
질문을 상실한 아이들이 자라 바보가 된다. 어른들이 아이들의 질문 앞에 최고로 경건해지는 것은, 아니 최고로 경건해져야 하는 것은, 아이들을 바보로 키울 권리가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노벨상 수상자는 “1+1이 어째서 2가 되어야 합니까?”라는 한 소년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쩔쩔 매면서 무려 11장이나 되는 ‘답변서’를 쓴 적이 있다. 그는 아이들의 질문 앞에 경건해져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이 대학에는 어떤 학생들이 옵니까?”라는 학부모 질문에 “어려서 질문이 많았던 아이들이 자라 우리 대학으로 옵니다”라고 대답한 총장이 있다. 그는 질문의 위대함과 경건함을 아는 사람이다. 질문이 죽으면 호기심도 죽고 호기심이 죽으면 탐구의 열정도 죽는다.
밖으로 공부하러 나간 한국인 유학생들에게서는 거의 공통적으로 세 가지 특징이 발견된다고 말하는 미국 대학 교수들이 많다. 질문이 없다, 자기 생각이 없다, 토론할 줄 모른다는 것이 그 3대 특징이다. 물론 이건 과장일 수 있다. 유학 초기에는 우선 말이 잘 안되니까 질문이 있어도 없는 척, 생각이 있어도 없는 척 해야 할 때가 많다는 것을 유학생활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안다. 토론도 마찬가지다. 세미나에서 어쩌다 한국인 학생이 발언하면 교수가 몸을 30도 각도로 기울이며 바짝 긴장하는 수가 있다. 무슨 소리를 하나 알아듣기 위해서다. 말은 서툴지만 발언 요지가 왜 없겠는가. 그럴 때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 미스터 김이 한 말은,” 하고 발언의 핵심을 다시 유창하게 요약해서 중계방송 해주는 수도 있다. 그런 교수를 만난 유학생은 행복하다.
그러나 한국 학생들의 소위 그 ‘3대 특징’이 전혀 터무니없는 평가냐면, 그렇지 않다. 영어를 쓰지 않아도 되는 대한민국 대학 강의실에서도그 세 가지 특징들은 여지없이 발휘되기 때문이다. 강의실에 올 때는 질문을 들고 와라, 대학생은 질문 생산자다, 질문이 없으면 공부도 없다, 이런 식으로 교수들은 질문을 권고하고 유도한다. 강의 시작하기 전에 질문지부터 제출하게 하는 수도 있다. 학생들의 머리속에 질문이 있어야 강의도 되고 토론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빠른 성과로 보답되는 일은 극히 드물다. 한 학기 내내 “질문하라”는 주문이 연거푸 떨어지지만 그때마다 학생들은 시선을 내려 깔면서 시무룩해진다. 그러다가 교수 자신이 궁금해진다. 도대체 이 시무룩의 이유는 무엇인가? 가감 없는 실화 한 토막--한 번은 어떤 교수가 휴게시간에 복도를 지나가는데 학생 몇이 한쪽에 몰려서서 저희들끼리 투덜대는 소리가 들린다. “교수님이 자꾸 질문하라, 질문하라 그러는데 뭘 알아야 질문하지.” 그날 이후 그 “뭘 알아야 질문하지”는 그 교수에게 크나큰 화두가 된다. 정말 뭘 알아야 질문하는가? 그러다가 그는 학생들에게 질문하는 법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마침내 깨쳐 알게 되었다고 한다.
질문하는 법? 질문하는 법은 고장 난 똥차 고치는 법, 피씨 프로그램 까는 법, 감자 수제비 뜨는 법과는 좀 다르다. 그것은 ‘어떻게’에 매달리는 방법지(know-how)의 기술이기보다는 묻는 행위 그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 정신적 습관에 더 가깝다. 반드시 뭘 알아야 질문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질문이 많은 것은 궁금한 것이 많아서이지 뭘 많이 알아서가 아니다. 궁금한 것을 질문으로 표출하는 정신의 습관을 유지하기, 거기서 질문이 나오고 질문의 능력이 자란다. 한국 대학생들이 질문하지 않는 것은 중고등학교 6년을 지나는 사이에 질문하는 습관보다는 질문하지 않는 습관에 더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질문의 습관을 봉쇄한다는 점에서 우리 중등교육은 교육이기보다는 ‘교육의 배반’에 더 가까운 특성들을 갖고 있다. 아이들이 궁금증을 발동하게 하기보다는 “얘들아, 이건 중요해, 시험에 나올 거야”라면서 이른바 ‘족집게’ 교사가, 과외선생이, 쓰레기통 뚜껑 열듯 아이들의 머리뚜껑을 열고 그 ‘중요하다’는 것들을 쏟아 붓는 것이 우리네 중등교육의 장기다. 그 방식의 교육으로부터 스스로 질문하고 발견하는 정신의 즐거운 습관이 자랄 길은 없다.
지난 한 10년 동안 소위 ‘인문학의 위기’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인문학도들에게 가장 많이 제기되는 ‘질문’ 중의 하나는 지금 이 시대에 인문학의 가치와 용도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가 의미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시장의 시대’다. 시장의 시대에 인문학은 무슨 돈이 되는가, 돈이 안 된다면 인문학의 설 자리는 어딘가--이런 질문이다. 이런 질문은 동정과 우려에서 나오는 수도 있고 비아냥거림의 문맥에서 나오는 수도 있다. 하도 자주 듣다보니 인문학이 ‘돈 버는 데’도 중요하다, 인문학의 경제적 가치는 이러저러하다, 어쩌고 하면서 시장시대의 인문학 옹호에 나서는 사람들도 있다. 인문학을 사람들의 현실적 삶에 훨씬 더 가까이 접맥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인문학은 인문학자를 위한 것이 아니고 인문학 전공자를 위한 것도 아니다. 무슨 일을 하건 질문하는 일이 모든 사람들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면 바로 그 질문하기를 정신의 습관으로 길러주는 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의 질문들은 인문학도만의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 질문의 하나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것이다. 나는 왜 여기 이 자리에 있는가? 한국 신문의 상당수 기자들은 ‘비뚤어진 기사를 쓰기 위해’ 그 자리에 있다. 상당수 정치인은 당리당략을 위해 거기 있고 상당수 교육 종사자들은 틀린 교육을 위해 교단에 서 있다. 명령과 양심 사이에서, 이해관계와 공익 사이에서 찢어지는 것을 경험하기 위해 어떤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 모든 사람이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라고 스스로 질문하게 하는 것이 인문학의 가치다.
도정일/경희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