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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문화일반

(37) ‘고려풍’과 ‘몽골풍’

등록 :2005-02-28 17:15수정 :2005-02-28 17:15


△ (왼쪽사진 시계방향으로) 원 간섭기에 제주도로 유입된 것으로짐작되는 조랑말. 족두리. 윗옷과 아랫도리를 따로 재단해 이어붙인 철릭. (오른쪽사진) 원에 수출된 ‘대방광불 화엄경’사경본. 고려청자. 고려인삼.

제국에 맞서 일궈낸 문화융합

고려 500년사는 국권을 지키기 위해 주변국들과 화전 양면의 교착관계를 유지하며 다양한 교류를 펼쳐 온 역동적 과정이다. 특히 후반기에 강화도로 도읍까지 옮기는 국난 속에서도 30년간(1231~1259년) 몽골의 7차 내침을 막아내고, 근 백년간(1259~1351년)의 원 간섭기를 슬기롭게 타개함으로써 몽골 중심천하에서 유일하게 나라의 자주권을 지켜냈다. 복잡한 환경 속에서 전개된 양국간 교류는 그 내용이나 형식이 실로 다양하여 문명교류의 본보기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고려인들의 30년 항몽전쟁은 몽골인들로 하여금 고려는 ‘비록 작은 나라지만 수십년 동안 공격했어도 복속시킬 수 없는’ 강한 나라로서 더 이상의 전쟁은 무모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물론 고려쪽에서도 장기 전쟁으로 인한 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양쪽간에는 마침내 강화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259년 24대 원종은 태자 신분으로 중국을 멸하고 원나라를 세운 세조 쿠빌라이를 찾아갔다.

“풍속 강요 않겠다” 약속 받아내

이 만남에서 태자는 몽골이 고려의 풍속을 고치도록 강요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불개토풍(不改土風)’이라는 약속을 받아낸다. 이 말은 단순히 풍속을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풍속이 존재하는 고려의 왕실과 제도, 영토와 주민을 유지하는, 이를테면 왕조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대관계로 폭넓게 이해되었다. 중국 왕조로 군림한 원제국의 세조 쿠빌라이는 중국의 전통적 외교정책인 사대관계를 표방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몽골천하’를 꿈꾸는 원나라로서는 양국 관계에 대한 일시적 타협에 불과한 이 강화 약속에 만족할 리가 만무했다. 그래서 약속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인질과 식량을 보내라느니, 군사 지원을 하라느니, 호구조사 결과를 보고하라느니, 다루가치(지방관아의 몽골인 장관)를 설치하라느니 등의 횡포한 요구를 하면서 고려에 대한 간섭을 본격화했다.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려고 원종의 아들인 충렬왕은 원세조의 공주를 맞아들여 부마의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구국의 일념으로 1278년 쿠빌라이를 찾아간 그는 협상 끝에 원의 주둔군과 다루가치를 철수시키고 조세 징수의 권한을 돌려받는 등 몇 가지 국권 회복 사항에 합의한다. 20년 전 원세조가 부왕에게 한 ‘불개토풍’의 약속과, 그 연장선 상에서 고려의 존속을 보장받는 사대관계의 기조를 재확인한 것이다. 이렇게 원세조 때 양국간의 관계를 규제하려고 모색된 체제를 ‘세조구제(世祖舊制)라고 한다. 이 ’세조구제‘는 향후 양국간 국가 관계는 물론, 교류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반적으로 군사적 정복과 정치적 경략, 간섭은 일종의 강제적 행위이므로 이에 따른 교류는 대체로 일방적 강요에 의한 전통문화의 파괴나 동화(同化) 같은 역기능적 접변을 낳는 것이 상례다. 그러나 적어도 ‘불개토풍’이나 ‘세조구제’ 같은 사대관계의 기조를 대의명분으로 한 이상, 고려와 원나라간에는 역기능적 접변과 더불어 전통문화와 융합하는 순기능적 접변도 공존했다. 이 사실은 문명교류사에서 주목할 만한 사례로 역학관계에서 한때나마 수동적 입장에 설 수밖에 없었던 고려가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능동적으로 대처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며-몽 관계 규정한 ‘세조구제’

원은 고려로부터 인삼을 비롯한 특수약재와 청자, 비단, 종이, 담비가죽, 사냥매 등 진귀품을 조공의 명목으로 토색(討索:금품을 억지로 달라고 함)하고, 해마다 양곡을 징발해 갔다. 또 세자들을 인질로 잡아놓고 세뇌교육을 시킬 뿐 아니라, 세조의 딸을 비롯해 황실 공주들을 고려왕의 비(모두 7명)로 삼게 했으며, 왕들에게도 몽골식 이름을 강요했다. 관직 이름에서도 부대를 ‘애마(愛馬:아이막)’, 역체관을 ‘탈탈화손(脫脫禾孫:톡토하순)’, 상관을 ‘나연(那演:나잔)’이라고 하는 따위의 몽골식 직명이 난무했다.

양국간 인적 교류에서 특이한 것은 고려 여자를 진공하는 이른바 ‘공녀(貢女)’다. 원세조 쿠빌라이는 충렬왕에게 보내는 조서에서 고려와 원은 이제 한 집안이 되었으니 통혼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태조 칭기즈칸이 13개 국을 정복했을 때 그 나라들이 다투어 미녀들을 바쳤다고 은근히 양국간의 통혼과 공녀를 종용했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도 간섭기의 약 80년간 원으로부터 ‘처녀진공사신’이 50여 차례나 고려에 와서 해마다 약 150명의 여자들을 징집해갔다. 수시로 뽑아간 여자는 부지기수다. 순결성과 정조관념이 유달리 강한 고려 여인들에게 ‘공녀’는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징발 사신이 한번 오면 나라가 ‘소란하여 닭과 개까지도 편안함을 얻지 못하고’, 목매달아 죽는 자가 속출했다. ‘공녀’를 기피하려고 조혼하고 여아를 숨기는 등 난데없던 폐습이 창궐했다.

원에 끌려간 공녀는 대개 원의 황제나 황후, 황족의 궁인이나 시녀가 되었다. 원 말에는 궁중의 급사나 시녀는 태반이 고려 여성이었으며, 지방관까지도 고려 여성을 처첩으로 거느렸다. 그러나 모든 공녀가 이런 비운에 빠진 것만은 아니고, 개중에는 순제의 정비가 된 기황후처럼 일세를 풍미한 여걸도 있었다. 그래서 원나라 천지에 고려식 복식과 음식, 기물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이를 두고 ‘고려양(高麗樣)’, 즉 ‘고려풍’이라고 했다. 물론 공녀들이 ‘고려풍’을 일으키는 데 한 몫 한 것은 사실이지만, 원에 유입된 선진 고려문물도 그 선양에 중요한 한 몫을 담당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 1232년 제2차 몽골침략군을 격파한 처인성(현 경기도 용인) 전투장면. (전국역사교사모임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1’, 휴머니스트, 2002)



고려풍 일으킨 공녀들

원세조는 고작 세금이나 거두고 시나 읊조리는 한인들보다 고려인들이 기술면에서 낫고 유학경서에도 능통하다고 찬사를 보내면서 ‘고려국유학제학사’를 설치해 고려 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도록 했다. 충선왕은 원나라 수도에 ‘만권당’이란 학당을 열어 두 나라 석학들이 만나 학문교류를 하는 장으로 만들었다. 원에 고려의 뛰어난 불전 사경본이 수출되고, 명의사 설경성(薛景成)이 원나라 세조와 성종의 병을 고쳐주었으며, 고려의 바둑 고수들이 초빙된 사실들은 선진 고려문물의 전파를 말해준다.

이 ‘고려풍’에 대비해, 고려에 들어와 유행한 몽골의 여러 이색풍속인 이른바 ‘몽골풍’도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몽골풍’은 주로 복식과 음식, 언어 등 생활문화 영역에서 일어났으며, 그 여파는 오늘날까지도 미치고 있다. 흔히 우리 복식사에서 말하는 ‘호복(胡服)’은 고려 때 들어온 몽골식 복장을 말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철릭이 있다. 원래 고려인들은 웃옷과 아랫도리를 하나로 잇고 소매가 헐렁한 포를 입었는데, 이때부터 웃옷과 아랫도리를 따로 재단하여 이어 붙이고 아랫도리에 주름을 많이 잡아 활동에 편한 몽골식 철릭이 유행하기 시작해 조선시대에는 문무관료들의 평상복으로까지 정착한다. 요즘도 전통혼례식 때 신부가 쓰는 족두리는 원래 ‘고고’라고 하는 몽골 여인들의 외출용 모자였던 것인데, 고려에 들어와서는 예식용 모자로 변했다. 상투 대신 정수리부터 앞이마까지 머리를 빡빡 깎고 가운데 머리카락은 뒤로 땋아내리는 이색적인 개체변발도 일시 적으로 선보였으며, 신부의 뺨에 연지를 찍는 풍습도 몽골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한다. 먹거리에서도 원래 불교국가인 고려는 육식을 꺼렸으나, 유목민 출신 몽골인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고기소를 넣는 만두 같은 고기음식을 접하게 되었으며, 오늘날 즐겨먹는 설렁탕도 양을 잡아 대강 삶아 먹는 몽골어의 ‘슐루’라는 음식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족두리·연지·설렁탕 등 전래

우리말로 굳어져버린 낱말들에서도 몽골어의 잔재를 찾아볼 수 있다. 왕과 왕비에게 붙이는 ‘마마’, 세자와 세자비를 가리키는 ‘마누라’, 임금의 음식인 ‘수라’, 궁녀를 뜻하는 ‘무수리’ 등은 주로 몽골 출신 공주들이 살았던 궁중에서 쓰이던 이름들로 몽골어에 말뿌리를 두고 있다. ‘벼슬아치’나 ‘장사치’, 속어인 ‘양아치’에서 어미격인 ‘치’는 ‘다루가치’나, ‘조리치’(청소부), ‘화니치’(거지), ‘시파치’(매사냥꾼) 등 직업을 나타내는 몽골어의 끝글자 ‘치’를 취한 것이다. 매와 말과 관련된 ‘보라매’나 ‘송골매’, ‘아질개말’(망아지), ‘가라말’(검은 말) 등도 몽골어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언어 교류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원세조 때 전래한 위구르 문자와 티베트의 파그스파 문자를 합쳐 만든 표음문자인 몽골 문자가 훈민정음 창제에 어떤 ‘힌트’가 될 수 있었으리라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다.

이질문명 ‘충돌’ 아닌 ‘교류’ 로

‘몽골풍’에 따라 한때나마 고려가 원나라 중심의 세계유통시장 구조에 편입된 것은 특기할만한 사항이다. 원에서 발행한 ‘지원통행보초’ 같은 ‘교초’, 즉 지폐가 고려에서도 유통됨으로써 고려는 통일 통화에 의한 국제교역에 동참할 수 있었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로 마치 원제국 서쪽 끝의 속국 일칸국(현 이란)에서 ‘초’자를 새겨넣은 지폐를 발행(1294년)해 사용한 경우와 같다.

이와같이 ‘고려풍’과 ‘몽골풍’으로 대변되는 고려와 원나라간의 교류에서 우리는 비록 이질문명이지만 생산적 융합이 이루어질 때, 문명 본연의 상부상조적 교류가 실현 가능하게 되며, 문명은 모방성이란 근본속성으로 인해 ‘불개토풍’ 같은 인위적인 제어도 무릅쓰고 사방으로 전파되고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수용된다는 문명교류의 유의미한 원리들을 터득하게 된다.

정수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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