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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딸에 대하여’. 찬란 제공
영화 ‘딸에 대하여’. 찬란 제공

새로운 ‘엄마’가 나타났다. 김혜자와 고두심으로 상징되는, 자애와 희생의 아이콘도 아니고,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나 ‘마스크걸’에서 염혜란이 보여준 지독하리만치 강인한 엄마도 아니다. 납득할 수 없는 딸의 선택에 한숨으로 긴 밤을 뒤척이지만, 결국 자식이 자신과 다른 존재임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엄마. 4일 개봉한 영화 ‘딸에 대하여’는 질기디질긴 심리적 탯줄을 끊어내고 자식으로부터 독립하는, 전에 없던 엄마의 초상을 그린다.

‘딸에 대하여’는 김혜진의 원작 소설을 이미랑 감독이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다. 좋은 원작을 섬세하게 세공한 연출력도 발군이지만 배우 오민애의 고요한 한숨과 쓰린 듯 담담한 표정이 각인으로 남는다. 연기생활 30년간 온갖 파고를 겪으며 갖게 된 “용기를 가지려면 두려움을 겪어야 한다”는 믿음은 그가 이 작품에서 연기한 엄마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독립영화계의 믿음직한 큰 언니였으며 최근 영화 ‘파일럿’과 ‘한국이 싫어서’, 드라마 ‘돌풍’ 등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보여준 오민애를 지난달 말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딸에 대한 걱정과 노후에 대한 불안을 속으로 삭이는 캐릭터와 달리 그는 “가보지 않은 세계를 겁내지 않는, 가끔 아들한테 무식하다는 핀잔을 들을 정도로 활발한 엄마”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영화 ‘딸에 대하여’에서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 오민애. 찬란 제공
영화 ‘딸에 대하여’에서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 오민애. 찬란 제공

병으로 남편을 먼저 보내고 홀로 요양보호사 일을 하며 사는 주인공의 집에 독립했던 딸(임세미)이 돌아온다. 엄마에게 한마디 양해도 없이 데려온 동거인은 동성연인(하윤경)이다. 헤집어진 엄마의 마음이 추슬러지기도 전에, 대학 강사인 딸은 전세 대출도 못 받는 자신의 처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교수의 부당 해고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맞기까지 한다. 한편 주인공이 돌보는 노인은 젊은 시절 존경받는 사회사업가였지만 돈과 핏줄이 없다는 이유로 요양원에서 쫓겨날 처지에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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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는 어둠 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엄마의 얼굴을 여러번 응시한다. 그늘진 무표정과 가늘게 흘러나오는 한숨에서 수백가지 말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그는 “말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슬픔이나 피로감은 내 안에 쌓여있는 재료니까 표현이 어렵지는 않았다”고 했다. “이 나이 들도록 회한과 상처가 왜 없겠어요. 나이와 상처는 비례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배우 조정석의 엄마 역으로 출연해 신스틸러로 활약한 영화 ‘파일럿’에서의 오민애.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배우 조정석의 엄마 역으로 출연해 신스틸러로 활약한 영화 ‘파일럿’에서의 오민애.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10대 때 학업을 중단하고 생업에 나서야 했을 정도로 힘든 성장기를 보낸 그는 27살 때 인도 여행을 가려고 찾은 여행사에서 “배우처럼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기자의 길을 결심했다. 하지만 순탄치 않았다. 30대 중반을 향하던 2000년 1월1일 절에 들어가 1년 반 동안 절집 생활을 하기도 했고, 연극계로 돌아와서는 ‘미투’ 국면 때 공연예술인노조를 만들어 전임으로 일하면서 오히려 무대와 멀어졌다. 가족을 돌보고 대학원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하는 등 연기 이외의 행보로 더 바쁘게 살다가 식구들에게 “딱 3년만 제대로 해보겠다”고 선언하고 만난 작품이 2019년 독립단편영화 ‘나의 새라씨’였다. 3년 뒤 ‘윤시내가 사라졌다’(2022)에 이르러서는 ‘영화제에 가면 꼭 만나는 배우’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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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뒤 회식 자리였어요. 젊은 감독이 나를 안아주며 축하해주는데 말 그대로 30년 묵은 설움이 싹 사라지더라고요. 그때 결심했죠. 나를 찾는 작품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 하겠다고.” 해마다 독립영화와 상업영화 가리지 않고 10편 넘는 작품 이력을 쌓게 된 계기다. “사람들이 저보고 좋은 작품만 출연한다고 하는데, 제가 출연한 작품 중 일부가 좋은 평가를 받은 거예요. 저는 정말 시간만 되면 출연 제안을 거절하지 않거든요. 후배들에게도 제안이 들어오면 이것저것 재지 말고 도전하라고 해요. 모든 현장에 배움이 있고 죽는 것만 빼면 모든 경험이 교훈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딸에 대하여’. 찬란 제공
영화 ‘딸에 대하여’. 찬란 제공

그는 마흔 넘어 낳은 아들에게도 “많이 부딪히고 깨지면서 살라고 말한다”고 했다. “뒤돌아보면 그게 그렇게 부끄러운 일도 아니거든요. 물론 당시에는 너무 쓰고 아프지만 이런 경험치가 지금의 저에게는 연기 재료로 쌓인 거죠.” 50대 후반의 오민애에게 20대 배우 못지않은 성장의 기대를 품게 되는 건 ‘딸에 대하여’에서 전에 없던 엄마를 보여준 것처럼 그의 안에 아직 다 꺼내지 않은 경험과 감정들이 남겨져 있기 때문일 터이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