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집 100년사 이래, 당대 현역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집의 저자로 백석과 김수영이 꼽혔다. 백석의 첫 시집 ‘사슴’이 최다 지지(14표)를 받았다. ‘백석 시전집’(8표)과 함께 백석의 시집만 22명이 지목했다. 김수영은 ‘거대한 뿌리’(10표), ‘김수영 전집’(8표), ‘달나라의 장난’(2표)으로 총 20표를 받았다. 북의 백석, 남의 김수영 격이다. 동료 시인 가운데선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가 11표로 1위를 차지했다. ‘남해 금산’ 등까지 모두 13명이 이성복 시집을 호명했다.
지난 상반기에 한겨레가 창비 시선,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을 통해 시집을 출간한 적 있는 시인들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다. 올해는 한국 최초의 자유시가 수록된 주요한의 첫 시집 ‘아름다운 새벽’이 나온 지 100년, 근대문학사에서 가장 널리 읽힌 김소월의 첫 시집 ‘진달래꽃’이 99년째 된다. 한국 최초 창작시집인 김억의 ‘해파리의 노래’는 101주년을 맞는다. 게다 지난 전반기는 창비 시선 500호,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600호를 돌파하고, 김혜순 시인이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받은 기념비적 시기. 이달 25일은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민음사)가 나온 지 딱 50년 된다. 설문에 참여한 시인 80명은 20대 중반부터 70대 후반으로, 등단 시기가 1960년대부터 2021년까지 걸쳐 있었다. 30문항이 넘는 설문으로, 실상 시인 여든과의 집단 인터뷰라 할 만하다. 애초 설문지는 총 343명에게 보내졌다.
‘가장 좋아하는 국내 시집 3권’을 묻는 질문에 백석·김수영·이성복의 시집에 이어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11표),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9표씩), 김소월의 ‘진달래꽃’, 김종삼의 ‘북치는 소년’,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6표씩), 김춘수의 ‘처용’(5표)이 꼽혔다. 전체 118종 시집이 지목된 가운데 김혜순·서정주·황지우·허수경의 시집이 4종씩으로 종수로는 가장 많았다.
‘지난 100년, 가장 좋아하는 국내 시 5편’에선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 첫손(9표)에 꼽혔다. 이어 김수영의 ‘사랑의 변주곡’과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가 7명, 기형도 ‘빈 집’, 김수영의 ‘풀’과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이 6명, 김춘수 ‘꽃’,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신경림 ‘농무’, 서정주 ‘자화상’이 5명에게 각기 지목됐다. 조사 당시 생존 시인은 신경림이 유일했으나, 지난 5월 그마저 타계했다. 전체 꼽힌 255편 가운데 3표 이상 받은 시가 32편(12.5%)에 그칠 만큼 시인이 좋아하는 시는 다채로웠다. 전체 목록에 시가 많이 올라간 시인은 14편의 김수영(총 33표), 11편의 김종삼(총 18표)이다. 현역 중엔 이성복(9편·10표), 황지우(5편·5표), 4편의 김혜순(5표)·신해욱(4표) 순이다.
‘가장 소개하고 싶은 외국 시집’으로 폴란드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심보르스카)의 ‘끝과 시작’(17표), 샤를 보들레르(프랑스)의 ‘악의 꽃’(10표), 울라브 하우게(올라브 헤우게·노르웨이)의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6표)가 최다 추천됐다.
김수영·백석·이성복의 세 시집을 ‘가장 좋아하는 시집 3권’에 솎은 시인은 단 한명이었다. 이 시인은 그 이유로 “가장 고독한 자리까지 간 시인의 언어만이 돌올하다. 시가 절대 개인적 산물이 아니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며 “좋은 시들은 항상 가장 사회적인 자리에서 가장 개인적인 방법으로 노래한다. 더러 그것은 노래가 아니라 절규였다”고 썼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