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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인 1939년, 고령 지산동 대가야고분군의 옛 39호분(현재는 5호분)에서 출토된 둥근고리 용머리 장식 큰칼(환두대도)의 모습.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일제강점기 유리건판 사진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일제강점기인 1939년, 고령 지산동 대가야고분군의 옛 39호분(현재는 5호분)에서 출토된 둥근고리 용머리 장식 큰칼(환두대도)의 모습.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일제강점기 유리건판 사진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500여년 전 대가야 지배자의 무덤 속에서 황금빛 칼이 튀어나왔다. 순금덩어리를 다듬어 만든 고리자루 안에 입에서 화염 내뿜는 순금제 용머리부조상을 넣고 붙인 큰 칼이었다.

이른바 ‘환두대도’라고 일컫는 가야의 보물 칼을 발견한 이는 일제의 어용 고고학자들이다. 85년 전인 1939년, 조선총독부 명령을 받고 경북 고령군 지산동 대가야고분군 현장에 조사원으로 급파된 아리미쓰 교이치와 사이토 다다시였다. 그들은 산능선에 흩어진 고분들 가운데 꼭대기에 있는 5호 무덤을 지목하고 바로 봉분을 뚫고 파 내려갔다. 5호분은 지름이 약 45m, 높이 11.9m에 이르는 거대 무덤으로, 영·호남지역 가야 고분들 가운데 가장 컸다.

현황 파악을 위한 약식 발굴이었는데도, 황금빛 환두대도를 비롯해 괴수 무늬 허리띠, 용 이미지를 수놓은 금동 화살통, 튼실한 대가야 토기 항아리들이 무덤방에서 막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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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급 유적임에 분명했지만, 그들은 정식 발굴보고서를 내지 않았다. 지극히 간략한 조사기록과 일부 출토품 사진들만 남겨놓은 채 발굴 구덩이를 묻고 떠났다. 6년 뒤 해방이 찾아왔지만, 5호분 발굴은 세간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가야시대 고분들 가운데 가장 큰 무덤인 고령 지산동 5호분은 이처럼 일제강점기 도굴에 가까운 발굴로 망가지는 비운을 겪었다. 그래서 해방 이후 가야사를 연구하는 고고역사학자들 사이에서 가야고분을 대표하는 5호분의 온전한 재발굴 조사는 묵은 소망으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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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마침내 이 숙원이 이루어지게 됐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와 고령군은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오른 가야고분군 유적 일부인 지산동 5호 무덤에 대해 재조사 업무협약을 맺었다고 12일 발표했다.

올해부터 재발굴조사에 들어가는 고령 지산동 고분군 5호무덤과 그 주변을 찍은 사진이다. 능선 정상부에 자리한 가야시대 최대 규모의 왕릉급 고분이다. 고령군 제공
올해부터 재발굴조사에 들어가는 고령 지산동 고분군 5호무덤과 그 주변을 찍은 사진이다. 능선 정상부에 자리한 가야시대 최대 규모의 왕릉급 고분이다. 고령군 제공
일제강점기인 1939년, 고령 지산동 대가야고분군의 옛 39호분(현재는 5호분)에서 출토된 둥근고리 용머리 장식 큰칼(환두대도)의 모습.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일제강점기 유리건판사진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일제강점기인 1939년, 고령 지산동 대가야고분군의 옛 39호분(현재는 5호분)에서 출토된 둥근고리 용머리 장식 큰칼(환두대도)의 모습.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일제강점기 유리건판사진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아침녘 안개가 감도는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풍경을 찍은 사진. 고령군 제공
아침녘 안개가 감도는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풍경을 찍은 사진. 고령군 제공

산능선에 자리 잡은 것이 특징인 지산동 고분군은 지난 세기 초 일제강점기 때부터 주목받은 대가야 지배층의 대규모 무덤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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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는 5∼6세기 경북과 경남북부권 일대에서 번영했던 가야의 지역 강국이었다. 3~4세기 가야권을 주도했던 금관가야를 밀어내고 가야시대 후반기 맹주 구실을 했다. 지산동 고분군은 전성기 대가야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970년대 5호분 아래의 44, 45호분 등을 발굴하면서 아랫사람을 희생시켜 묻는 순장 흔적 있는 대가야 지배자 무덤의 얼개가 드러났고, 다량의 갑옷, 투구, 칼, 꾸미개, 토기 등이 확인돼 국민적인 관심을 모았다. 뒤이어 지난 2017~2018년엔 고분군 중소형 무덤 74기에 대한 후속 조사로 금동관모, 갑옷, 칼, 순장 추정 인골 등 유물 1천여점을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939년 지산동 옛 39호분(현재 5호분)의 무덤방에서 대가야 지배자의 큰 칼(환두대도)이 출토될 당시 발굴현장 모습. 칼끝 고리와 손잡이 외에는 칼의 몸체가 땅에 묻혀있는 모습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일제강점기 유리건판사진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939년 지산동 옛 39호분(현재 5호분)의 무덤방에서 대가야 지배자의 큰 칼(환두대도)이 출토될 당시 발굴현장 모습. 칼끝 고리와 손잡이 외에는 칼의 몸체가 땅에 묻혀있는 모습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일제강점기 유리건판사진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지산동 산기슭과 능선에는 봉토무덤 700여기를 포함해 1만기 넘는 고분이 흩어진 것으로 추산되는데 5호분은 이 고분들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핵심 무덤으로 꼽힌다. 조선시대 펴낸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금림왕릉’(錦林王陵)으로 기록되어 있다. 금림왕은 대가야 또는 반파국(伴跛國)의 왕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른 역사서에는 등장하지 않고, 오직 ‘신증동국여지승람’에만 등장하는 수수께끼의 군주다.

연구소 쪽은 재발굴 조사기간을 일단 3년 정도로 잡고 있다. 2026년까지 봉토와 무덤 주인공의 주검과 껴묻거리를 묻은 매장주체부, 무덤 주변부에 대한 정밀 발굴조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이를 바탕으로 2028년까지 조사내용과 출토유물을 수록한 발굴조사보고서를 발간할 계획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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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호 소장은 “발굴 조사와 더불어 무덤의 토목공학적 구조와 각종 유기물 등을 분석하는 작업들도 진행할 예정”이라며 “관련 기록이 적어 베일에 싸여 있던 대가야의 고분축조 기술과 매장 의례 등도 밝혀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고령 지산동 대가야고분군 5호무덤 발굴조사를 위한 업무협약식이 12일 고령군청에서 열렸다. 조사를 맡을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의 황인호 소장과 이남철 고령군수가 업무협약서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국가유산청 제공
고령 지산동 대가야고분군 5호무덤 발굴조사를 위한 업무협약식이 12일 고령군청에서 열렸다. 조사를 맡을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의 황인호 소장과 이남철 고령군수가 업무협약서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국가유산청 제공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