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 16회. 양규 장군은 선 채로 죽었다. ‘고려전’ 양규열전에 나오는 ‘양규와 김숙흥은 화살을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맞고 함께 전사했다’는 대목을 김한솔 피디가 해석을 더해 연출한 것이다. 김 피디는 지난 10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양규는 거란 황제와 거란군에게 고려라는 공포를 뼛속까지 심어주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그런 양규가 죽어서라도 무릎을 꿇는 모습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양규는 손에 힘이 빠지자 입으로 화살을 당기고, 거란 황제를 향해 열보, 아홉보 힘든 걸음을 옮긴다. 인물의 성격이 드러나는 감동적 연출에 치열한 전쟁 장면이 더해져 양규의 마지막 사투는 명장면으로 떠올랐다.
한국방송(KBS2)의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이 전쟁 장면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1회 시청률 5.5%(닐슨코리아 집계)로 무난하게 출발했는데 흥화진 전투를 준비하면서 서서히 오르더니 거란군이 서경을 공격하기 시작한 10회에 처음으로 10%를 찍었다. 양규의 마지막 사투가 펼쳐진 15회(10.2%)와 16회(10%)에서 다시 두자릿수를 기록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전쟁의 하이라이트는 강감찬이 벌이는 귀주대첩이겠지만,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 등장하는 양규를 중심으로 한 게릴라 전투가 흥미롭고 열악한 상황에서 울리는 승전고가 통쾌함을 준다”고 짚었다.
한국방송 대하사극이 전쟁 장면으로 주목받는 것은 이례적이다. 한국방송은 1981년 ‘대명’을 시작으로 대하사극을 꾸준히 제작했지만, 2008년 미디어 환경 변화로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비용 문제 탓에 가장 먼저 사극 속 전쟁 장면을 줄였다. 2014년 방영한 ‘정도전’도 50부 동안 황산벌 전투와 위화도 회군 두 장면에만 집중했다. 2004년 ‘불멸의 이순신’을 350억원 들여 104부작으로 만들었던 것에서 제작비도 회차도 점차 줄었고 결국 명맥이 끊겼다. 2016년에는 ‘정약용’이 대본 리딩을 앞두고 제작이 중단되기도 했다. 한국방송 출신의 한 드라마 피디는 “사극은 제작비가 많이 들지만 피피엘(PPL∙간접광고)이 어려워 수익을 기대할 수 없다”며 “‘고려거란전쟁’을 인물이 아니라 전쟁을 중심에 둔 이야기로 만든 것 자체가 모험”이라고 했다.
‘고려거란전쟁’은 귀주대첩, 삼수채 전투, 흥화진 전투를 중심으로 여러 게릴라성 전투들이 등장한다. 달라진 제작 환경을 과감하게 수용하며 기술로 막대한 제작비라는 난제를 풀어냈다. 한국방송 수원 드라마 세트장을 허물고 그 부지에 대형 야외 크로마 세트장을 세워 주된 촬영장으로 삼았다. 컴퓨터그래픽으로 대규모 군중을 만들고 지형의 높낮이도 조절하며 장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김 피디는 “후반부에 나올 귀주대첩의 99%를 크로마 세트장에서 촬영했다. 100여명으로 촬영한 뒤 이를 디지털 크라우드(디지털 군중) 기술로 20만명으로 늘렸다”며 “한국 사극에서는 처음 시도한 것”이라고 했다. 30만 대군이 한날한시에 모이는 귀주대첩과 흥화진 전투에서 각각 이전 사극에서 잘 보여주지 않았던 산성 전투, 짧은 병장기로 가까운 거리에서 싸우는 단병접전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기술 때문이다. 김 피디는 “귀주대첩이 명성에 견줘 지금껏 잘 다뤄지지 않은 이유는 벌판에서 대규모 인원을 표현할 기술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려거란전쟁’은 전우성· 김한솔 피디 공동연출인데, 주요 전쟁 장면을 김 피디가 도맡는 식으로 분업을 이뤘다. 김 피디는 대하사극 전쟁 장면에서는 이례적으로 50쪽에 이르는 콘티(촬영 컷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를 만들 정도로 정교하고 감각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양규의 마지막 전투에서 화살을 당기는 손, 화살촉, 얼굴 등을 화면 가득 담는가 하면, 배경음악을 빼고 양규의 숨소리, 화살이 당겨지는 소리 등에 집중하기도 했다. 김 피디는 전쟁 장면만 고민하고 연구하면서 기존 사극에서 시도하지 않았던 사실적인 묘사에 보다 집중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목가리개다. 그는 “갑옷에서 목가리개는 필요한 요소인데 전쟁 촬영 중에 배우들의 수염이 떨어지고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이전 사극에서는 잘 표현하지 않았다”고 했다. 갑옷은 검으로 단번에 베이지 않는 점에 착안해 장검으로 몸이나 머리에 충격을 주고 단검으로 갑옷의 이음새를 찌르는 식의 동작 등도 구현해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