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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문화일반

헤어질 결심 만든 그 노래, 정훈희의 안개

등록 :2022-08-06 09:00수정 :2022-08-06 11:58

[이재익의 노래로 보는 세상]
1967년 노래 ‘안개’로 등장한 정훈희. 이 곡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 영감을 줬다. 사진은 1970년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팝스 페스티벌’ 무대에 올랐을 당시 정훈희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67년 노래 ‘안개’로 등장한 정훈희. 이 곡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 영감을 줬다. 사진은 1970년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팝스 페스티벌’ 무대에 올랐을 당시 정훈희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무게감에 비해 흥행 성적이 아쉬운 영화들이 있다. 박찬욱이라는 감독의 이름값에 박해일과 탕웨이라는 배우들이 가세했던 <헤어질 결심>도 그러하다. 상영관이 거의 사라진 지금 손익분기점은 살짝 넘겼지만 200만명은 넘기지 못했다. 흥행 성적은 그렇다 쳐도 이 영화는 두고두고 할 말이 많은 작품이다. 여기서는 칼럼의 성격에 맞게 영화 속 노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정훈희의 노래 ‘안개'는 이 영화에 소재로 쓰이기 전에 이미 이 영화를 탄생시킨 씨앗이었다. 박찬욱 감독은 이 노래를 듣다가 영화 <헤어질 결심>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단다. 그런데 이 노래 역시 또 다른 작품에 영감을 받아 탄생한 노래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이다. 이 소설은 1967년 김수용 감독에 의해 <안개>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신성일과 윤정희가 주연을 맡고 작곡가 이봉조가 음악을 맡았다. 이봉조 선생은 원래 가수 현미에게 노래를 부탁하려고 했는데 16살에 부산에서 서울로 상경한 정훈희를 만난 후 마음을 바꾸었다. 요약하면, 안개 자욱한 가상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을 쓴 소설 ‘무진기행'이 영화 <안개>와 노래 ‘안개'를 탄생시켰고, 그 노래가 수십년 후 <헤어질 결심>의 영감이 된 것이다.

봉준호가 디테일의 대가라면 박찬욱은 지적 유희의 끝판왕이다. 안개가 어디까지 번지는지 보자. 그의 회사 이름이 ‘모호필름'인데 안개는 모호함의 상징이다. 무진이라는 도시는 <헤어질 결심>에서 ‘이포'라는 가상 도시로 재현된다. 여자 주인공이 우리말에 서툰 외국인이라는 설정 때문에 영화 속 인물들의 의사소통 또한 모호해진다. 노래 가사 또한 인물들의 감정과 이어진다. 영화 속 해준(박해일)과 서래(탕웨이)의 마음이 꼭 이렇지 않았을까?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 생각하면 무엇 하나 지나간 추억 /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 안개 속에 외로이 하염없이 나는 간다.”

오랜만에 무수한 평을 양산한 영화였으니 필자는 두 가지 제멋대로 감상평을 적어본다.

먼저 이 영화는 ‘인공적’(artificial)이다. 우리말보다 영어 단어에 집중해주기 바란다. 이 단어는 ‘예술’(art)을 품고 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작위성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고도로 통제된 작위성을 뽐낼 때가 많은데, 순한 맛으로 찍었다는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해준과 서래, 또 그들의 사랑이야기는 도무지 현실 세계에 있을 법하지 않다. 철저하게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지만 그 존재가 너무나 정교하여 관객의 몰입을 이끌어 내고 예술의 경지에 이른다. 인공적 예술(artificial art)이랄까.

두 번째 키워드는 ‘신파’다. 요즘 들어 신파는 ‘억지 눈물을 짜내는 구닥다리 플롯' 정도의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원래 신파라는 말의 뜻은 일본에서 전통극 ‘가부끼'의 반대 개념으로 쓰인 ‘새로운 흐름’(new wave)이였다. 서양에서 영향을 받은 새로운 형식의 연극을 칭한 표현인데 우리나라에 신파극이 건너온 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의 부정적인 의미로 뜻이 변한 것이다. 그런데 <헤어질 결심>은 100년 전 그 시절 신파의 요소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촉망받는 형사가 살인 사건 용의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부터가 완벽한 신파다. 이루지 못한 사랑을 원망하며 목숨을 끊는다는 설정은 신파의 최고봉 <이수일과 심순애>가 울고 갈 판. 변사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릴 것만 같다. 그런데 이게 왠 일. 영화를 보는 내내 원래 ‘신파'의 말뜻 그대로 새로운 파도가 가슴에 필려든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파도가...... 대단한 자신감과 솜씨다.

지금까지 박찬욱 감독의 영화 중에서 노래를 가장 잘 쓴 예는 <올드보이>에 나오는 ‘보고 싶은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바뀌었다. <헤어질 결심>과 ‘안개'는 그냥 영화와 노래가 한 몸이다. 이 노래는 원곡도 좋지만 정훈희와 송창식이 영화를 위해 함께 부른 버전도 있는데 아직 못 들어본 분들이 있다면 꼭 감상해보시길. 나는 이미 수없이 들은 이 노래를 딱 한번만 더 듣고 나서 당분간 이 영화 생각은 안 하련다. 아아, 깊고 깊은 밤 그 사내는 헤어질 결심과 헤어질 결심을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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