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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문화일반

‘단 한시간 만이라도’…여성의 목을 짓누른, 그 발 좀 치우라

등록 :2022-04-16 08:59수정 :2022-04-16 14:34

[한겨레S] 이유리의 그림 속 권력
여성의 노동

19세기 재봉사 그린 ‘단 한시간…’
가족 부양하려 저임금 견딘 여성
전쟁 때, 남자들 빈자리서 일하다
전후엔 ‘다시 부엌으로’ 강요당해
애나 블런던, <단 한 시간만이라도>, 1854년, 캔버스에 유채, 예일대학교 영국미술센터.
애나 블런던, <단 한 시간만이라도>, 1854년, 캔버스에 유채, 예일대학교 영국미술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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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사고로 부상당한 남자아이가 있다. 아이 아버지가 크게 다친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고, 아이는 곧장 수술실로 보내졌다. 그런데 수술실에 들어온 의사가 아이를 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난 이 아이를 수술할 수 없습니다. 얘는 내 아들입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혼란스러운가? 그렇다면 당신은 의사를 남자로 생각했다는 증거다. 의사는 남자아이의 엄마였기 때문이다. 사실 직관적으로 의사를 남성으로 생각할 만도 하다. 지금은 그나마 상황이 나아졌지만, 긴 세월 동안 전문직 종사자는 보통 남자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동시장 내 성차별’이 우리에게 의사가 엄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리게 했으리라.

가부장 사회는 한동안 임금 노동을 오로지 남성의 몫으로 규정했다. 그 불문율을 어기고, 집 밖으로 나온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일자리의 질은 대체로 형편없었다. 1970년대 섬유·의류 산업을 보면 당시 봉제공장이 밀집한 동대문 평화시장의 노동자 중 85.9%가 14~24살 여성이었다. 당시 섬유·의류 산업은 경제를 일으켜 세운 ‘효자산업’이었지만, 이는 여성 노동자들의 건강을 갈아 넣은 결과였다. 이들은 한 달에 고작 이틀을 쉬고 하루 15시간씩 일하는 지독한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허락’받아 삶 갈아넣은 여성 노동

한국의 소녀들이 미싱을 돌리다 재봉틀 위에 피를 토하던 때로부터 100여년 전, 영국의 소녀들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영국의 화가 애나 블런던(1829~1915)이 여성 재봉사를 묘사한 <단 한 시간만이라도>를 보자. 창으로 새벽 햇살이 들어오자, 오늘도 밤을 꼬박 새웠다는 걸 깨달은 여성은 바느질하던 수제 셔츠를 잠시 손에서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깍지를 낀 채 기도한다. ‘주님, 어서 이 고된 삶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세요.’

하지만 단 한 시간만이라도 쉬고 싶다는 그의 바람은 아마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의 소녀 미싱사가 그랬던 것처럼, 이들도 먹고살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쉼 없이 일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영국 여성 평균임금은 10실링5펜스. 남성 평균임금의 40.5% 수준으로 여성이 스스로 생계를 꾸리기 어려운 저임금이었다. 블런던은 이처럼 여성 재봉사들의 열악한 처지를 그림으로 그려, 토머스 후드의 시 ‘셔츠의 노래’ 구절을 첨부해 1854년 영국미술가협회 전시회에 출품했다. ‘셔츠의 노래’는 여성 재봉사의 처참한 상황을 고발한 시였다. “여자는 어울리지 않는 넝마를 걸치고 앉아/ 바늘과 실을 부지런히 움직인다 (…) 가난과 굶주림과 더러움 속에서, 여전히 슬프고 가녀린 목소리로/ 셔츠의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시는 의미심장한 구절로 이어진다. “남성들이여, 신은 여러분에게/ 아내와 어머니와 여동생을 선물했지/ 당신들이 너덜너덜 해어지게 하는 건/ 아마포가 아니야/ 체온이 따뜻한 사람의 목숨이지.”

‘가족의 성공이 곧 나의 성공’이라는 말 아래 1970년대 우리네 ‘시다’들이 오빠와 남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저임금 노동에 나섰던 것처럼, 19세기 영국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가부장 사회는 여성들을 가정 안에 묶어두려고 했지만, ‘집안 남자들의 뒷바라지와 가족부양’이라는 조건이 붙으면 말이 달라졌다. 이 예외상황 아래서는 여성들도 자신의 목숨을 깎아가며 ‘바깥일’을 할 수 있도록 기꺼이 허락했던 것이다.

하워드 밀러, &lt;우리는 할 수 있다&gt; 포스터, 1942년, 국립미국사박물관.
하워드 밀러, <우리는 할 수 있다> 포스터, 1942년, 국립미국사박물관.

여성의 노동은 남성이 없을 때만 잠깐 쓰고 갈아끼우는 ‘건전지’ 같은 것이기도 했다. ‘일하는 미국 여성’의 상징으로 알려진 리벳공 로지를 보자. 1942년 하워드 밀러(1918~2004)가 포스터 속에 등장시킨 로지는 근육을 드러내며 “우리는 할 수 있다(We can do it)!”고 외치고 있다. 이 외침은 그대로 포스터의 제목이 되었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일까.

1940년대 미국 여성들이 가사 노동 외에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상황이 달라졌다. 수백만 미국 남성이 전쟁에 동원되자 산업 전반에 노동력은 극심하게 부족해졌고, 결국 화물용 비행기 제작과 조종 등 통상적으로 백인 남성이 채웠던 일자리에 여성들을 충원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와 산업계는 “재봉틀을 돌릴 수 있으면 리벳 건도 쏠 수 있다”고 열렬히 선전했다. 밀러의 <우리는 할 수 있다>도 그렇게 탄생한 포스터였다.

여성들은 화답했다. ‘리벳공 로지’의 실제 모델인 나오미 파커 프레일리(1921~2018)도 그중 한 명이었다. 리벳공은 건설 현장에서 철골 고정장치인 리벳 건을 사용하는 노동자를 뜻한다. 프레일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앨러미다 해군 항공기지 군수공장에서 비행기 날개에 구멍을 뚫고 리벳을 박아 이어붙이는 작업을 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토사구팽의 상황이 벌어졌다. ‘여자들도 할 수 있다’며 독려하던 자들은 남자들이 돌아오자 돌변해 ‘여자들은 부엌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한 것이다. 결국 프레일리도 리벳 건을 강제로 내려놓고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의 레스토랑인 ‘인형의 집’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해야 했다.

유리절벽 위에 올려진 여성들

‘여성가족부는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요즘 남녀평등은 이뤄졌다고 한다. 그런데 왜 여성 노동자들의 시련은 여전히 진행형일까. 여성은 여전히 해고 1순위이며, 해고를 면하더라도 정수리 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이 있어서 승진도 어렵다. 이유는 여전히 우리 사회가 여성을 ‘진짜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용주는 남성이 ‘진짜’ 가장이라 생각하고, 여성은 집안에 사정이 생기거나 경제적 형편이 나아지면 일을 그만둘 ‘임시 노동자’로 여긴다. 그러므로 고용주는 남성을 우선 승진시키며, 핵심 업무에는 여성을 앉히지도 않는다. 이는 그대로 남녀 임금 격차로 이어진다.

아쉬울 때만 여성을 노동 현장으로 부르는 현상도 여전하다. ‘유리절벽’이라는 말이 있다. 조직이 위기에 처하면 여성을 유리절벽 위의 리더로 내세워 수습하게 한다는 말이다. 브렉시트 수행이라는 난맥 상황에서 영국 총리가 된 테리사 메이, 게임회사 액티비전 블리자드가 성폭력·성차별 문제로 고소당했을 때 최초의 블리자드 여성 리더가 된 젠 오닐이 그 예다. 문제는 유리절벽에 오른 여성은 성공할 확률보다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유능한 여성에게도 ‘폭탄 처리’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여성들에게 호의를 베풀어달라는 게 아니다. 그저 우리의 목을 짓누르고 있는 그들의 발을 치우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여성 인권운동가 세라 그림케의 일갈이다. 그렇다. 여성 노동력은 남성들의 성공을 위한 거름도, 언제든 대체 가능한 잉여도 아니다.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만큼 일하고, 일한 만큼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기본권’부터 챙길 수 있도록, 그 발부터 어서 치우라.

<화가의 출세작> <화가의 마지막 그림>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을 냈다. 그림을 매개로 권력관계를 드러내고, 여기서 발생하는 부조리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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